윤열자/수필가
해마다 8월이 되면 내 한평생 동안 가장 아팟던 때를 회상한다. 이 천리타향 큰 미국땅 한쪽에서 단 혼자 이세상에 남겨진 것 같고 초라하고도 가슴을 치고 막막했던 시절이 되살아 나는 것이다.
1967년 11월 초기 이민자로 ‘아메리칸 드림’를 안고 한 가족이 한국을 떠나온 지 4년째, 아직도 고달픈 이민 생활에 기초도 잡지못한 때에 내 남편은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40대 초반이었던 나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 살아온지 이제 35년이 되었다. 직장을 은퇴한지도 10년이 넘었다.
그 어렵고 막막한 이민 고생담은 벌써 두 권의 수필집에 기록한 바 있다. 남편이 떠난지 31년이 되는 금년 8월에는 각각 이곳저곳 흩어져 사는 네 자녀 가족들이 LA근교 그린데일에 위치한 남편의 묘소에서 7년만에 함께 만나는 자리를 가졌다.
큰 아들 내외는 시애틀에서, 둘째 내외는 휴스턴에서, 딸은 나와 함게 아틀란타에서, 막내 아들만이 LA 가까운 애나하임에서….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네 형제 자매들이 서로만나 반가워서 부둥켜 안는 모습이 정겨웠다. 단지 이자리에 6명의 손주들이 참석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이렇게 네 가족이 함께하는 자리를 갖기도 참 쉬운일이 아니었다. 각자 사업과 직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는 한국에서 시애틀에 왔던 두명의 조카가 40년 만에 함께 참석해 마치 남, 북한 친척재회 만큼이나 오랜 만남이었다.
네 자매 가족이 모두 함께 만난 것은 7년전 내가 이곳 아틀란타로 이주하기 전 나의 고희 모임에서 였다. 마치 엇그제 같았지만 세월이 훌쩍 지났다.
인생은 누구나 다 청춘도 있고 중년도 있고 노년도 꼭 겪는다. 조국을 등지고 이 나라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디에 살건 각자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몫을 해야 한다. ‘어떻게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자신들에게 달렸다.
이제는 모두 중년이 넘는 나의 네 가족들이 무난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모습을 5박 6일간 함께 지켜 보면서 고생만 하다 떠나간 남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남은 가족들이 이렇게라도 형제, 자매간 끈끈한 정으로 가끔이나마 한자리에서 보내는 기회가 있기를 하나님께 기원하면서 네 가족들과의 아쉬운 이별을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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