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잠이 들고 있으면 항상 아버지가 안고 침대에 눕혀주던 생각이 난다. 그땐 그게 얼마나 좋았던지...잠이 푹 들지 않아서 깰수 있어도 난 눈을 뜨지 않았다. 손수 연필을 칼로 깎어 주시던 아버지에게 난 새로 나온 자동 연필 깎기를 사달라고 졸라본 적이 없다. 세자녀의 발톱 손톱 자르는 것도 역시 아버지의 몫이였다. 임신말기에 발톱을 자르기가 힘들어 남편에게 부탁할때도 그때가 생각났다.
가끔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엔 수염난 얼굴로 자고 있는 세딸들을 하나씩 깨워 뽀뽀를 하시던 아버지가 미웠던 기억 외엔 내 어린날의 아버지는 언제나 쉴 수 있는 편안한 의자였고 그늘이였다.
월급날이면 양손 가득 사오셨던 누런 빵 봉지도 그립기만 하고 귀신잡는 해병대시절의 얘기에 재미 없어하는 딸에게 끝까지 얘기해주시던 아버지.
해마다 크리스마스시절이 오면 어김없이 몰래 산에 가서 나무를 꺾어 크리스마스 츄리를 장식 하던 그때가 그립고 여름 휴가철이면 가족이 함께 다녔던 여행에 기억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 가족여행은 우리가 사춘기를 접어들면서 계속되지 못했지만... 그때 못내 아쉬워 하시며 엄마와 떠나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세딸을 둔것이 늘 행복이였던 아버지에게도 아들의 허전함은 목욕탕에서는 어쩔수 없었던지 첫째인 나에게 한번 얘기 하신적이 있다. 그때 아들 노릇은 내가 하겠다고 얼마나 큰소리를 쳤든지... 그래서 나의 신랑감의 조건중 제일 먼저는 차남이어야 했다. 다 큰 딸을 시집보내면서 "언제나 아빠는 너의 편이다. 신랑이 뭐라 하면 당장 전화해라." 장난삼아 하신 얘기지만 여전히 지금도 아버지는 나의 든든한 빽(?)이다.
미국으로 훌쩍 와버려 맏딸 노릇 못하는 것이 죄송스러운데 그래도 아버지는 사람은 큰 물에서 살아야 한다며 허허 거리신다. 얼마전 오랜만에 뵙는 아버지는 또 많이 늙으셨다. 안겨본 아버지의 가슴 역시 예전보다 더 작아지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아버지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쉴 수 있는 편안한 의자와 그늘이 되어드려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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