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응원식
또 긴긴 겨울이 시작되었나보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남편이 어느 샌가 노란색 레이커스 저지를 입고 TV앞에 앉아 있다. 그것은 곧 NBA 농구 시즌이 시작되었음을, 그리하여 며칠에 한번씩은 저녁마다 온 집안이 고성과 괴성으로 뒤덮이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노란색 저지를 입은 날은 홈 경기, 보라색으로 뒤집어 입은 날은 원정경기가 있는 날이다. 팀과 보조를 맞춰 응원하려는 결연한 의지의 표출이다.
이런 날은 차라리 저녁하기가 좀 쉽다. 국에, 나물에, 고기에, 아무리 공들여 식탁을 차려본들 응원에 열중한 남편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숟가락을 휘두르기 때문에 나는 될수록 간단한 일품요리로 식사준비를 한다. 어차피 식탁에는 앉지도 않고 TV 앞에 내려앉아 한 손에 그릇을 들고 먹을 것이니 여러 반찬이 필요 없는 것이다.
카레라이스나 스파게티, 육개장이나 양지머리 고깃국이 응원식사의 단골메뉴. 때로 떡국과 만둣국을 끓여주기도 하고 정 피곤할 때는 라면정식으로 대치할 때도 있다. 주말에는 비빔국수를 말아내기도 하고, 샌드위치나 치킨 샐러드를 내놓는 적도 있다.
오늘 저녁엔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다행히 오늘 경기가 있는 것을 아침에 알았기 때문에 출근길에 밥을 한 솥 해놓고 갔다. 금방 지은 더운밥으로 볶음밥을 하면 밥알이 뭉개지기 쉬워 일부러 찬밥을 만든 것이다.
냉장고를 뒤져 호박, 버섯, 피망등 몇 가지 야채를 꺼내 잘게 썰고 김치와 고기도 먹기 좋게 채 썬다. 냉동칸에 거의 항상 양념한 불고기가 있지만 없는 날은 햄이나 소시지를 썰어 넣기도 한다. 이 재료들을 약간의 버터와 함께 중간불에 달달 볶다가 고기가 다 익고 김치와 호박이 숨죽었을 무렵 밥과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불을 좀 줄여 2개의 나무주걱으로 고루 섞어가며 볶는다. 사실 이 과정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정신 사나운 것은 남편은 아주 맵게, 아들은 보통 맵게를 원하기 때문에 2개의 냄비에 따로 재료를 넣고 볶아대느라 바삐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한 20분 난리를 치고 나면 간단하게 끝나는 것이 김치볶음밥이라 어떤 때는 은근히 경기가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컴온! 코비, 레츠 고!”
남편이 고래고래 악을 쓴다. 아마 경기가 잘 안 풀리는가보다. 샤킬 오닐이 발가락 수술을 받았대나. 평소에 조용하던 사람이 도대체 어디서 저런 엄청난 소리를 내는지 아이와 나는 어지간히 단련이 됐음에도 하룻밤에 여러 번 깜짝깜짝 놀라 튀어나오곤 한다.
지난 시즌에는 정말 공포스런 순간이 많았다. 칙 헌의 해설로 경기를 관전해야만 하는 남편이 그의 해설이 안 나오는 TV 경기가 있을 때면 라디오를 들으며 TV를 보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TV를 뮤트해놓고 움직이는 장면만 보면서 칙 헌의 해설이 나오는 라디오를 혼자 이어폰을 끼고 듣는 것이다. 그러면 온 집안이 아무 소리 없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지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꽥꽥 소리를 질러대면 부엌에서 일하던 나는 경끼한 듯 놀라 펄쩍 뛰곤 했다. 이제 칙 헌이 유명을 달리 했으니 그런 일은 없겠지…
코비와 샤킬과 오리는 야단도 엄청 맞고, 칭찬도 많이 듣는다. 레이커스가 남편의 코치대로만 하면 반드시 이길 터인데 왜 말을 안 듣는 것일까.
올 겨울은 또 얼마나 길어질지, 이제 초반인데 벌써 남편의 목소리가 가는걸 보니 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준비해야할 것 같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