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서 한국기업인들이 현지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지불하지 않은 채 야반도주해 현지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는 외신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한국 기업인들의 잇따른 잠적으로 졸지에 직장을 잃은 수천명의 노동자들은 자카르타 인근 공단지역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다 급기야는 한국대사관으로 몰려가 5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고 한다. 관련기업들은 최저임금 상승과 수출주문감소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고 둘러댔지만 국적을 떠나 최소한의 상도의 마저 저버린 이들의 무책임한 행동은 결국 국가망신으로까지 이어졌다.
요즘 LA다운타운은 한인의류업자들의 잇단 야반도주로 뒤숭숭한 분위기다. 다운타운 업계에서 업자들이 하루밤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이번처럼 피해자 수나 규모가 컸던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최근 몇 달 동안 사업체 이름을 바꾸는 등의 방법으로 채권자들의 눈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부도수표만 남발하고 잠적해 버린 일련의 과정이 다분히 계획적이고 고의적이었다는 점에서 피해자들은 분노하고 있다.
사실 이번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됐었다. 9·11테러 이후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열악한 재무구조, 그리고 무리한 경영방식과 극히 비정상적인 크레딧 거래관행 등 이 같은 일이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 있었다는 게 의류업계 종사자들의 말이다. 이번 사태가 악순환의 끝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유사사태의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회의론이 업계에 공공연히 떠돌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가장 피해가 컸던 피해자들은 밀린 돈을 되돌려 받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번 기회에 일부업자들의 비뚤어진 상도덕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단단히 벼르고있다. 한인업계에 대한 타인종업자들의 신뢰도가 떨어져 다른 영업분야에 까지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하는 업자들도 있다. 섬유업계에서는 크레딧 거래관행에 따른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의류업체와의 계약 시 보증인 또는 담보를 설정하거나 업주에 대한 크레딧 조회를 일반화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처음부터 망할 생각으로 사업에 덤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망할 땐 망하더라도 최소한의 상도의를 갖추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관련업계의 비정상적 거래관행이 바로 잡히더라도 일부 무책임한 업주들의 ‘먹고 튀자’식 사고방식이 고쳐지지 않는 한 앞으로 더 큰 부도사태가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지금 이 순간 행여 라도 야반도주를 생각하는 업주가 있다면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국가망신사태까진 아니더라도 거래업자와 한인업계 전체가 입게될 피해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하 천 식<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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