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 한 장남은 달력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2002년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니. 2000년이 온다고 흥분했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세해가 지났다니 그럴 리가 있을까? 사용처가 분명치 않아 없어진 것만 같은 돈을 찾아보듯 기억의 호주머니 속을 뒤집어 본다. 뒤집어 보았자 구멍 뚫린 호주머니이다. 남아있는 시간이 있을 리 없다.
연말이 되어 이렇게 아쉽고 황당한 느낌에 잠시라도 잠겨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어떤 프랑스의 사변가는 “남은 인생의 시간을 일분 이분 세어보다가도 인생의 모래시계를 흔들어 시간을 재촉하는 것이 우리들”이라며 시간에 대한 인간의 모순을 간파한 바 있다.
지난 여름 장대비 속에 아버지를 먼저 보낸 어머니는 당신의 80평생이 꼭 하루였던 것처럼 덧없고 짧았노라고 회고하신다. 해마다 찾아오는 연말이든 인생의 연말이든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섭섭함은 매 한가지인가 보다.
그렇다 해도 요즘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아쉽고 서운하다 못해 혹시 누가 시간을 훔쳐 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마저 드는 것이다. 과거 위장병약 선전에 나왔던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이라는 문구만 보아도 “현대사회는 바쁘다”는 것이 당연한 명제가 되어 버린 듯하다.
그런데 기계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 허접스러운 일은 기계에 맡기고 우리는 좀 더 여유롭고 넉넉하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컴퓨터의 용량은 나날이 기하학적으로 올라가고 교통통신 수단은 첨예화하는데 우리의 ‘시간 없어함’은 상대적으로 심해지고 있으니 필시 문명과 시간에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현대인의 시간과의 달리기 경주는 1769년 증기엔진의 발명으로 시작된 산업혁명 이후부터일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개인 컴퓨터의 보급으로 일어난 일상의 변혁들은 산업혁명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삶의 스피드를 바꾸어버렸다.
한두 해 전일로 기억하는데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느린 음식’(Slow Food)이라는 문화축제가 열렸었다. 조리 시간이 긴 각종 요리와 와인이 넘치고, 의미 있는 대화와 만남이 풍성했다는 이탈리아 사람들 특유의 잔치였지만 한편으로는 패스트푸드로 밀고 들어오는 미국의 세계화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일침이기도 했다.
‘세계화’의 명분으로 진행된 세계 문화의 미국화가 비판의 표적이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자동차와 컴퓨터를 전 세계에 보급시킨 미국은 실상 시간에 쫓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정신 빈곤의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 허기를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로 채우다 보니 온 국민의 3분의1 이상이 과체중 비만환자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과거의 하루도 24시간이었을 테고 우리가 사는 오늘도 역시 24시간이다. 우리가 겪는 시간에 대한 초조함은 쓸데없는 기계문명에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데서 오는 강박관념에 불과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 TV에 소비하는 시간에 살아온 햇수를 곱해보면 아마도 무시무시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반 문명으로 선회해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무책임한 역설을 펴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빠르고, 많고,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사회에서 때로는 느리고, 적고, 단순한 것이 미덕일 수 있음을 이 연말에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김아정
칼스테이트 노스리지 연극학 교수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