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정계 6년’ 청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생애 두번째이자 마지막 도전’에 실패하고 6년여의 새로운 정치실험을 마감하고 홀연히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 후보는 20일 기자회견에서 "6년전 정치에 들어올 당시의 꿈을 이루지못한 회한이 어찌 없겠습니까만 깨끗이 물러나겠다"면서 "비록 정치를 떠나지만 언제 어디에 있든 국민 여러분과 늘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후보가 정계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딘것은 지난 96년 2월.
`대쪽 대법관’ `성역을 타파한 감사원장’ `소신총리’를 끝으로 야인으로 돌아갔던 이 후보는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내디딘다.
정계입문 후 "독불장군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당시 김대통령의 경고에 맞서 "비민주적 정당에는 미래가 없다"고 `1인 보스정치’에 정면으로 저항한 끝에 결국 정계입문 1년11개월만에 제1당 대선후보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 병역문제 등으로 인해 다른 어느 후보보다도 혹독한 `정치적 검증’을 받으면서 타격을 입었고, 이후 이인제 후보의 탈당과 비주류의흔들리기에 시달리다 97년 대선에서 39만표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97년 대선후 당 명예총재로 정치일선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던 그는 98년8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제1야당 총재로 전면에 복귀했고, 2000년 5월 전대에서 김덕룡 후보 등의 도전을 물리치고 연임돼 당 총재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특히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전 의원 등 당내 계파 수장과 중진들을 과감히 물갈이해 `대학살’이라는 평가를받기도 했지만 정치개혁을 선도해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북풍’, `세풍’, `안풍’ 등으로 정치생명을 위협받기도 했지만 강력한 장외투쟁이나 재판을 통한 정공법으로 대처하며 위기를 벗어났고, 이같은경험탓인지 `비열한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반드시 끊겠다"고 다짐해왔다.
이후 총선승리와 재보선 승리를 계기로 유력한 대선후보로 자리잡는 한편 여권의 각종 실정과 부정부패 등에 힘입어 `이회창 대세론’을 공고히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 민주당의 국민경선제 도입으로 시작된 정치권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박근혜 의원의 탈당과 `빌라 게이트’ 등으로 인한 지지도 추락으로 모진 시련을 겪기도 했다.
5.10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되며 건재를 과시한 그는 당무에서 손을 떼고 각종 민생.정책투어를 통한 `국민을 위한 정치’와 6월 지방선거 및 8.8 재보선승리 등을 통해 지지율을 제고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병풍’ 공세를 통과해야만 했고 국민통합 21 정몽준후보의 `정풍’에 밀리기도 했지만 오뚝이 처럼 되살아나 선두에 서서 투지를 붙태웠다.
그러나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해 젊은 세대에 접근하는홍보전에서 실패한데다 방만한 조직 마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득표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행운의 여신은 "제가 선 이길이 합당치 않으면 날 제쳐 주시고, 그렇지 않다면나라와 국민을 위해 뛸수 있도록 붙잡아 달라"는 이 후보의 간절한 기도를 끝내 외면한 셈이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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