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3층 짜리 고층아파트에 산다. 내가 사는 층의 복도에 마련된 쓰레기 투입구로 쓰레기를 버리면 지하실에 마련되어 있는 큰 쓰레기통 속으로 곧 바로 들어간다. 그렇게 채워진 쓰레기통들은 담당 청소부가 오후 늦게 파킹장 한 쪽에 내어다 놓는다. 매일 새벽에 청소차가 와서 그 쓰레기통들을 수거해 간다. 그런데 문제는 새찬 바람이 불 때이다. 밖에 내다놓은 쓰레기통들이 바람에 넘어져 이리저리 구르면서 속에 담겨진 쓰레기들이 거리 사방으로 흩날린다. 같은 내용물이지만 통속에 모여있을 때와 마냥 흩어져 있을 때의 모양과 느낌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요즈음처럼 비바람이 잦을 때는 이런 난감하고 지저분한 풍경이 자주 연출된다. 며칠 전, 아파트 앞에서 차를 출발시켜려고 하다가 감동적인 광경을 보았다.
그날도 바람이 꽤 심한 날의 늦은 오후였는데 웬 사람이 쓰레기통 뚜껑들을 차곡차곡 여미고 있었다. 통 밖으로 솟아오른 쓰레기 더미를 두 팔로 꾸욱꾸욱 눌러 내리고 뚜껑을 잘 여며 닫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난 순간적으로 부끄러웠고또 한편으로는 감격했다. 바람만 불면 쓰레기가 대책 없이 흩날려 다니는 것을 늘 봐 오면서도 난 왜 한번도 쓰레기통을 여며야겠다 고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부끄러움이었고 반면에 감격스러웠던 것은 우리 동네에 저런 사람도 있었구나 하는 감격이었다. 그런데 그 감격은 불과 채 10초도 지속되지를 못했다. 쓰레기통을 여미고 있는 사람의 외투자락 안으로 그가 입고 있던 청소부의 복장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청소부였고 당연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감격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한 사람이 행한 일이 그가 누구냐에 따라서 의미와 가치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 같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면 감동이 없다. 그런데 당연하지 않는 일을, 안 해도 될 사람이 할 때는 감동이 된다. 그런 면에서 목사가 전도하는 것보다는 평신도들이 전도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과 영향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치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이회창씨나 조금 후에 퇴임하게 될 김대중대통령은 앞으로 큰 감동을 국민들에게 선사할 기회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현직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은퇴한 대통령이나 은퇴한 정치인이 정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던져 봉사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얼마나 큰 감동이 될까. 정치가로서 자신이 외치고 주장했던 것들이 자신의 입지와 야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나라
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증명도 될 것이며 아울러 그 인생의 말년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존경받는 정치원로의 출현, 이것은 우리 민족 모두가 목말라하는 소망이자 동시에 이루어야 할 과제다.
이런 아름다운 전통이 만들어져야 정치 판에서 한 번의 선거에 모든 것을 걸고 배팅하는 식의 한탕주의나 기회주의 그리고 개인적 욕심에 따른 이합집산이 치유되기 시작할 것이다. 정말로 나라와 민족을 것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이 그래서 부러운 것이다. 이제 우리도 패배한 정치인 혹은 실패한 대통령이었지만 성공한 인생을 사는 모습을 보고싶다. 쓰레기통을 치우는 것을 직업으로 가지지 않은 사람이 쓰레
기통을 치우는 모습을 보고싶은 것이다.
쓰레기통에서의 10초간의 감동이 있었던 그 다음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교회로 운전해 가다가 깜짝 놀랐다. 큰 쓰레기통 뚜껑이 도로 한 복판에 나와 있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차를 피해 가다가 더 놀랐다. 지나치면서 보니까 쓰레기통 뚜껑이 아니라 맨홀의 뚜껑이 열려있었던 것이다. 차의 바퀴 하나가 완전히 빠질 만큼 큰 구멍이었다. 내가 빠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문제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새벽 5시. 캄캄한 도로. 언제 누가 빠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차를 되돌렸다. 쇠로 된 맨홀 뚜껑은 혼자서 움직이기에 만만치 않았다. 가까스로 구멍까지 끌고 가서 덮었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맨홀 뚜껑이 절대로 저절로 열릴 수는 없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열어놓았을 것이다.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
를 일이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럴수록 지나가던 누구라도 뚜껑을 덮어야 한다. 새해에는 곳곳의 쓰레기통에서 우리 스스로가 감동을 만들어 내어야 할 것이다. 청소부들이 모든 쓰레기통의 뚜껑을 덮는 것을 기대하기나 은퇴한 정치가들의 미담소식을 기대하고 가만히 있기에는 우리의 생존환경이 너무 지저분하거나 혹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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