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이상 연령층은 중고교 시절의 만원버스를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막힌다. 정류장을 출발할 때마다 운전기사가 한번씩 급커브로 승객들을 버스 안쪽으로 추슬러 넣어야 여차장이 겨우 출입문을 닫을 수가 있었다. 콩나물 시루 같은 차안에서 고개를 마음대로 돌릴 수가 없었던 것은 물론, 키 작은 여학생들은 숨도 제대로 쉴수가 없었다.
아비규환 같은 이런 장면이 60년대 계몽 캠페인에 쓰였었다. “많은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산아제한 캠페인이었다. 인구 밀도는 높고 국민소득은 낮은 당시 한국에서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선 먹는 입을 더는 것이었다. 쥐꼬리만한 수입으로 올망졸망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느라 허리가 휘어지던 것이 각 가정의 형편이었던 만큼 호응은 빨랐다.
60년대 6명이던 평균 출산율은 70년 4.5명, 80년 2.8명, 90년 1.6명, 2001년의 경우 1.3명으로 급속히 낮아졌다. 미국(2.13) 보다 낮은 것은 물론 인구 감소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기는 프랑스(1.89), 영국(1.64), 일본(1.33) 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자녀가 셋 이상이면 ‘미개인’으로 놀림 받을 정도로 출산억제 일변도의 분위기에서 초래된 한가지 현상은 낙태에 대한 지독한 무감각. 한국처럼 고민없이 낙태가 시술되는 사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 산아제한이 정부 시책이 아니라 여성들의 인권 차원에서 전개된 미국에서는 낙태처럼 까다로운 이슈도 없다. 미국에서 산아제한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경제적, 육체적으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임신으로 심신이 피폐해지는 여성들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피임기구가 흔치 않았던 당시 가장 보편적인 산아제한법은 불법 낙태였다. 미국 산아제한 운동의 어머니로 꼽히는 마거릿 생거도 빈민촌 여성이 두 번이나 혼자 낙태를 시도하다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22일은 미국 여성들이 어두컴컴한 불법 시술소에서 벗어나 합법적 의료시설에서 낙태를 할 권리를 부여받은지 만 30년 되는 날이다. 로우 대 웨이드 소송사건과 관련, 연방대법원은 태어나지 않은 생명체 대신 자신의 몸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제 과학이 발달하면서 태아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태중의 아기를 죽게 만들었을 때 이에 살인죄를 적용하는 주가 늘고 있고, 일반 자녀와 마찬가지로 태아에 대해서도 메디케이드 혜택을 적용하는 주가 늘고 있다.
“인간은 수태 그 순간 이미 인간이다”“남의 몸에 대해 왜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 여성의 몸에 대한 결정권은 여성 자신이 갖는다”는 낙태 찬반 진영의 해묵은 논쟁이 다시 시끄러워지고 있다. <권정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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