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이름
우리 신문사에는 구내식당이 있어 바쁠 땐 나갈 필요 없이 그곳서 손쉽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다. 식당 메뉴는 매일 한가지로 정해져 있는데 비빔밥이나 삼계탕 같은 일품요리일 때도 있고, 국이나 찌개에 반찬 두어가지가 나올 때도 있다. 가격은 2.50달러로 반드시 총무국에서 식권을 구입해야하기 때문에 회사 직원들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이 식당에서 매일 거의 100명분 정도 되는 음식을 해내는 직원은 두사람. 그중 주방장 격인 젊은 여성이 인기가 좋다. 음식솜씨가 좋은데다 언제나 친절하며 일도 열심히 하는 그녀는, 그 모든 것에 더하여 키도 크고 미인이라 모두들 칭찬의 대상이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무슨 일로 나에게 전화하였다.
“저 식당아줌만데요~”
그녀의 첫마디에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식당아줌마라니, 아니, 자기 이름이 있을텐데 왜 식당아줌마라고 하는 것일까?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나도 그제껏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고 사람들이 그녀를 부르거나 이야기할 때 모두 식당아줌마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의 이름보다 식당아줌마라고 소개하는걸 더 자연스럽게 여기게 된 것 같다.
그 때 나는 우리들에 대해 조금 화가 났다. 다같은 한국일보 직원이면서 왜 누구는 기자아줌마가 아니라 정숙희씨라고 불러주고, 누구는 식당아줌마라고 부르느냐 말이다. 그녀의 이름은 김기순이므로, 외부사람이라면 모를까. 우리 직원들은 동료인 그녀를 부를 때 김기순씨, 해야 마땅하다.
일전에 이런 이메일을 받았다.
“정기자님, 뵙기는 여러번 뵙고 인사도 나누었지만, 그래서 보시면 아실지도 모르지만 제 이름을 한 번도 정식으로 말씀드리고 인사를 나눈 것 같지가 않아 일단 설명을 드려야겠습니다. 처음 뵙기는 이재철 목사님 집회 때 뵈었고, 연례 싱글 미니스트리 모임 때도 한 두어번 뵈었고, 야채꽃 강습회 때도 두해에 걸쳐 뵈었고, 글쎄 ‘용희엄마’래야 아실지, 라카냐다 살다 서울 들어간 미세스 조라 하면 아실지-친척 되신다고 하던데- 제가 한국사람이라 누구 엄마로 기억을 하고 있는지 이름을 기억 못하고 있네요. 어쨌든 용희엄마 남편 친구, 이러면 대충 누군지 아실 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여자에게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저 뉘집 딸이다가 시집가면 무슨댁, 아기를 낳으면 누구 엄마, 그러고 나서 모든 여성은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 여자란 영원히 집에서 밥하고 자식 키우면서 늙으면 못된 시어머니에 주책맞은 노인네로 변모하는 익명의 집단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는데 우리 모두 서로 이름을 불러주자. 딸이 더 이쁘다고들 하고, 여자가 더 활동적이며, 의대생의 절반이 여학생으로 변해버린 세상, 지금 이 시대에 식당아줌마, 용희엄마는 좀 심하지 않은가.
퍼스트네임이 더 친근한 이 미국땅에서도 한인여성들은 이웃에서, 교회에서,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사람들끼리도 서로 미세스 박, 미세스 리, 김 집사, 이 권사로밖에 친구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자녀의 이름이 곧 엄마의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 당신 주위에 있는 여자 친지의 이름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라.
나는 사람들이 미세스 차 혹은 원겸이엄마, 이럴 때보다 숙희씨, 혹은 정숙희씨 하고 이름을 불러줄 때가 더 좋다. 시인도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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