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909년 10월26일)은 95년 전 만주 땅 전쟁터 하얼빈 역에서 애국자 안중근 의사께서 32세에 우리 민족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한 날이다.
안 의사는 하얼빈의 의거로 중국을 살리고 동양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한 평화의 사도다. 이 의거가 결행된 순간 세계는 놀랐으며 한국사람이 살아있음을 세계에 알게 하였으며 국내, 외 동포들에게 독립의 의지와 나라를 찾아야 하겠다는 독립정신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의거 10년 후 세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한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뿌리가 되었다. 또한 20년 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같은 의사를 낳게 했다. 즉 민족의 얼이 살아있음을 세계 사람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을 맞이한 우리 모두는 안 의사와 같이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절실함을 느 낀다.
해외에서 사나 국내에서 사나 내가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안 의사와 같이 생명은 바치지 못할지라도 무엇을 하던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과 생활이 안 의사를 따르는 애국의 길이다.
한국인이라는 것이 바로 주체성이고 자주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나라는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역사의 전통인 민족의 얼이 없어지면 그것이야말로 슬픈 일이다. 안 의사야말로 지나간 많은 역사 속에서 조국을 구하려는 선열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분이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탄생하였다. 29세에 (1907년) 국운이 기울자 블라디보스톡에 갔다. 의군참모중장의 직함으로 의군 300명을 거느리고 전과를 올렸으나 일제 정기군의 총반격으로 다시 해삼위로 철수하고 다시 가리라는 마을에 머물면서 11명의 동지들과 투쟁에 대한 토의를 하는 중에 안 의사가 단지동맹을 제의했다. 모두가 찬동하므로 모두는 왼손 무명지를 자르고 12명 청년의 불같은 심장은 한 덩어리로 얽혀졌다.
그후 초가을의 일이다. 난데없이 신한촌의 대동공보사의 주필 이강으로부터 속히 와달라는 전보 한 장이 온 것이다. 안 의사는 지체없이 뽀셋트 항구에 가서 배타고 신한촌에 도착 했다.
사실 하얼빈에서 간행되는 원동보 신문을 보여 주었다. 제1면에 실린 기사에 ‘일 수상 이도공 도만시찰’이란 제목 밑에 일본 추밀원 의장 이등박문이 10월 하순 러시아 대장대신을 만나기 위해 하얼빈에 가게된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안 의사는 이강, 윤능효를 만나서 상의 끝에 윤능효로부터 전 재산 200원(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억5천 만원의 가치)을 받아, 하얼빈에 가 만민이 보는 앞에서 처단했다. 우리 천만 동포의 심장을 격동시키고 환기시킨 날이다.
이날을 맞이하여 안 의사가 생명을 바쳐놓고 결행한 애국애족의 희생정신을 우리도 기리고 후세에도 가슴마다에 길이 새겨지길 바란다.
윤경학
미주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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