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아버지의 기일에 즈음하여 ‘아버지의 기일에’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 글을 쓰면서 울었고, 활자화 된 신문의 글을 읽으며 또 울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팩스로 보낸 그 글이 친정식구들 또한 차례대로 울렸다고 한다. 팩스를 먼저 받은 오빠가, 복사 본을 나중에 받은 동생이, 그리고 엄마까지...
또다시 11월. 그리고 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오고 있다. 다시 한번 이 글을 쓰면서 아버지를 추억한다.
일전에 어느 분의 수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기 중 ‘종일본가’라는 글귀에 대해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아버지도 운영하던 주유소의 화재로 사업을 접으신 후 한동안, 아니 꽤 오랫동안 집에 계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집에 계셔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렸고 단지 친구들이 집에 오고 싶어할 때 왠지 아버지가 집에 계시다는 것이 챙피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따돌려야 했던 것이 속상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좌절되고 우울한 나날들이었음에 분명한데도 아버진 자식들에게 화풀이를 하신다 던가 그런 적이 단 한번도 없으셨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런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추억의 필터가 모든 부정적인 것을 걸러내고 좋은 기억만을 간직하게 해주어선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가끔 아버지는 특별식으로 학교에서 돌아오는 우리를 맞으셨는데, 그 특별식이 주부생활 20년차인 나도 엄두가 안 나는, 더욱이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그 당시로서는 쉽지 않으셨을 손수 만드신 찐빵 혹은 도넛이었다. 반죽과 팥소까지 다 손수 만드신 것이니 얼마나 시간과 손이 많이 갔으랴. 적적한 ‘종일본가’의 시간을 우리를 생각하며 준비하고 만드신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의 눈엔 그저 쟁반에 수북히 쌓인 먹음직스런 도넛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아버지의 찐빵과 도넛에서 아버지의 말없는 사랑을 깨달은 건 30몇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쓰면서이다.
몸이 약해 할머니의 특별한 관심과 편애를 받으셨다던 아버지. 아버진 이제 어린 시절의 친구들 속에서 아버지도, 가장도, 남편도 아닌 그냥 어머니의 아들인 자신, 그냥 자기 자신일뿐인 유년기의 자신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진 칠 년째 그리운 부모님과 대부분의 친구들과, 형님과 함께 계신다. 그곳에서라면 ‘종일본가’가 그렇게 쓸쓸하지 않으리라. 돌아가신 후의 아버지의 그 평안한 모습이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크리스틴 최/아케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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