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회. 중남미의 독립 6. 시몬 볼리바르 1
셋째, 본토인들과 식민지 태생의 백인들에 대한 본국의 불평등 정책이었다. 식민지 출신은 정치, 경제, 군사, 종교 등 어느 분야에서나 본토인들과 차별을 받았으며, 고위직을 차지할 수 없었다.
넷째,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가혹한 에스빠냐의 식민지 경제 정책이 본국에 대한 식민지인의 반감을 누적시켰다. 스페인은 본국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가혹한 관세를 부과하였으며, 특히 외국 상품에 대하여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더구나 식민지의 상품이 본국의 상품과 경쟁이 될 때는 식민지 상품의 생산을 즉각 중단시켜 식민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다양한 배경이, 본국이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어 에스빠냐 황제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자마자, 각국의 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요인들이었다.
중남미 독립의 영웅인 Simon Bolivar에 대하여 알아보자. 중미 5개 국을 독립시키고, 5개 국 대통령을 지낸 위대한 인물인 시몬 볼리바르는 지난 1,000년간 세계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 100명중 25위에 선정된 사람이다. 1위는 에디슨, 2위는 컬럼버스였으며, 나폴레옹은 12위였다. 사실은 콜럼버스가 1위여야 맞다.
1783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출생한 볼리바르는 대대로 지주와 장교를 지낸 부유한 스페인계 혈통을 가진 집안 출신이었다. 17세가 되던 해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2년 후 마리아 로드리게스와 결혼하였으나, 신혼의 꿈이 다 깨기도 전인 결혼 8개월만에 아내가 병사함으로써 19세에 홀아비(viudo)가 된 후 독신(soltero)으로 일생을 살았다. 아내의 병사 후 파리로 가서 3년을 보내며 지적 수업을 쌓았으며, 또 그 곳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을 접할 수 있었고 그 혁명사상에 한껏 매료되었다.
1805년 22세 때 로마의 한 사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볼리바르는 일생을 건 중대한 선서를 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의 명예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내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의 마음과 나의 팔뚝은 에스빠냐의 권력이 우리를 속박한 그 사슬을 깰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
1811년 베네수엘라는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볼리바르는 독립군 총사령관인 미란다 장군 휘하에 대령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하였다. 계속되는 에스빠냐 식민지 주둔군과의 전투에서 볼리바르는 뛰어난 자질과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지닌 군인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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