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에 대해 어느 신문은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고 평했다. 그리고 꼭 6개월 후 그 영화는 DVD로 나왔고 그 인기 또한 높다고 특필했다. 맞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에서는 옳은 말이다.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모니터해 본 결과, 그 영화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었다. 또한 그 영화를 통해 참회나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찾기 어려웠고 신앙심이 강하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의 정서 속에서도 잊어져 있음을 알았다.
어떤 목회자는 “그 영화를 권장했던 교회들이 있는 판에 나의 느낌을 말했다가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것 같아 조심스럽다”고 했다. 극찬하는 목회자도 있었다. “이 영화는 가급적 기독교기관에서 귀한 자료로 삼아 선교에 적극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교인의 도리가 아닌 것 같다’는 사람, 별로 라는 사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람, 너무 끔직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람, 차마 볼 수 없어서 중간에 극장을 나왔다는 사람,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사람, 입장권까지 사주면서 권장했다는 교회 등등… 이것은 영화 전반에 대한 의견들이다.
요즘 소위 각 교회마다 ‘열린 예배’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분별없이 번지고 있다. 즉, 예수의 이름만 붙으면 무조건 복음송, 무용, 간증이 되고 내용이나 전개에는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한국 교계의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뉴에이지와 록음악의 교회 침투를 경계해야 한다는 강한 목소리가 많았지만 모두가 ‘열린 예배’에 동화되었는지 지금은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즉,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 영화도 상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수난’은 인간 구원을 위한 과정이다. 골고다의 수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주인공 ‘예수’는 온 몸에 그렇게 많은 핏자국을 뿌리면서도 사실적 고통을 진솔하게 연기하지 못함으로써 ‘예수의 수난’에 동참하려던 관객들에게 신앙적 감동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롯 유다가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다면 멜 깁슨은 예수의 수난 과정을 영화로 만들어 돈을 번 현대판 가롯 유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감독은 이 영화의 주인공을 ‘인간 예수’가 아닌 초인적인 신적인 존재로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
이 영화가 감동적인 영화가 되지 못한 주요 원인은 인간의 고통과 그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 예수’를 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감독은 ‘하나님 예수’가 아닌 사람의 몸으로 오신 ‘인간 예수’가 감당하는 ‘역사적인 수난’이 더없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관객들의 참회와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류 구원의 경의적인 소재를 폭력물에 식상한 현대인들의 구미를 자극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폭력의 대상으로 삼아 상업성 짙은 폭력 영화를 만들었다.
차호원
한미가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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