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박정희 대통령은 마지막 신년사에서 “휴전선에서는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용 제3 땅굴이 또 발견되어 그들의 무력적화 야욕이 다시 한번 백일하에 폭로되었다”고 지적했다. 6.25 전쟁 때 미군이 강원도 양구 북방에서 인민군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이름을 지은 펀치보울(Punch bowl) 옆 가칠봉에서 최일선 소대장으로 김일성 고지와 스탈린 고지를 바라보며 인민군의 동태를 관측했었던 필자의 경험이다.
1960년 전후에는 철책도 방벽도 없이 녹슨 가시철선 2~3줄을 말뚝에 걸어 2km씩 간격을 두고 남방한계선, 군사분계선, 북방한계선을 표시했었다. 이렇게 부실한 철조망을 앞에 두고 경계근무를 하자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삭풍이 부나 밤낮 할 것 없이 매복을 해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실상 물샐틈없는 철통같은 경계는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때때로 무장 간첩도 침투했었고 가끔 봄이면 산삼을 캐기 위해 심마니가 북쪽으로 월선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많은 인민군이 귀순하기도 했고 소수의 국군이 월북하기도 했다. 지금은 155마일 휴전선에 철책을 설치해 두었기 때문에 침투하자면 그 철책을 자를 수 있는 특수 연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침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공식 비공식으로 위장해서 왕래가 가능할 뿐 아니라 간첩을 아예 잡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전에 “민간인이 철책을 절단하고 월북한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다니 정말 상식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필시 남침용 땅굴을 굴착하면서 굴착 진척 지점과 방향을 측량하고 확인하기 위해 왔다간 것으로 추정된다. 전사를 통해 보아도 상대방의 막강한 화력 앞엔 땅굴 전술밖에 효과적인 전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천연의 요새지 여순을 탈취하기 위해 일본 북벌군 사령관 노기 장군은 13만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막강한 화력으로 인해 절반의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 노기 장군은 포기하지 않고 고안해낸 것이 땅굴 전술이었다.
이에 따라 150여일 동안 굴을 파서 마침내 러시아군의 경내로 진입하여 러시아군을 섬멸하고 승리했다. 1965년부터 10년 동안 치렀던 베트남 전쟁 때도 미국의 막강한 화력에 호지명의 월맹군은 땅굴 전술로 대치하여 무력 적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라크 전쟁도 막강한 미군의 화력 앞에 후세인의 정규군은 무릎을 꿇었지만 게릴라들은 땅굴 전술로 전환하여 저항하며 소생하려 하고 있으며 후세인 자신이 땅굴에서 생포된 바 있다.
이러한 전례를 감안해 볼 때 북한 인민군은 6.25남침 전쟁의 실패를 되풀이 않기 위해 막강한 미군의 화력을 피하면서 무력 적화할 수 있는 전법은 오직 땅굴전술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땅굴 굴착에 전력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의 깊게 경계해야 한다.
박종식
예비역 육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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