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아침산책을 놓치면 저녁 무렵에 집을 나선다.
어스름 없이 갑자기 찾아드는 어둠 때문에 오후산책은 마음이 바쁘지만 겨울저녁의 하늘과 산과 들은 가슴 떨리게 아름답다.
창백한 노랑에 엷은 회색이 훑고 지나간 하늘은 얼음처럼 반짝여서 눈이 시리고, 벌거벗은 검은 나무들은 영욕의 세월을 지나온 수도승처럼 처연하다. 새들과 다람쥐들은 또 하룻밤의 잠자리를 위해 숨어드는데 먹이 사냥에 정신 팔다 늦은 놈들의 퍼덕거리는 소리가 갈 길이 먼 나그네의 심정으로 몰아간다.
대기는 나무 타는 냄새로 향긋해서, 오막살이 굴뚝에 실연기 오르는 내 고향 들길을 걷는 듯한 몽상에 잠기게 하고, 늙은 나무 가지에 걸린 거미줄엔 벌레조차 없어 폐업한 상점모양 쓸쓸하다.
<해는 졌고 언덕들은 희미하다. 내 마음의 산맥에는 산꼭대기에 빛이 조금 남아 있는데, 성 스러운 밤이 감돌고 있으니, 나는 아직 피곤하지 않지만 돌아가야 한다. 내 집으로- 땅으로-. 보이는 것, 듣는 것, 냄새, 감촉, 맛, 지성 -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영원한 크레타의 연인 카잔차키스의 생을 마치는 순간의 독백이 떠오른다.
천지의 생성과 인간의 생성은 같아서, 지구라는 존재의 조건과 꼭 같은 지, 수, 화, 풍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람이라니, 이곳에서의 삶이 끝나면 물질인 육신은 흙과 물과 바람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영혼은 구만리 창공을 날아 그분에게로 돌아갈 뿐인데, 아직도 죽음이 내게 슬픔인 것은 긴 이별이기 때문이다.
먼데서 반가운 사람이 올 때, 이미 헤어질 때의 고약한 기분을 생각하여 그 순간의 기쁨에 방해를 받는, 한마디로 ‘걱정도 팔자인 사람’.
그래서 마음은 보고싶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수시로 날아간다.
흙을 사랑하다 흙으로 돌아간 어머니, 그 오대산 산자락에 서면, 어느새 그날처럼 비가 내리고, 그리운 친구가 있는 서울로 가면, 음울한 겨울하늘아래 표정 없는 인파에 부대끼며 거리를 걷는다. 먼지 섞인 바람이 휘몰아치고 코끝이 얼어붙어 예쁜 사람이 없게 만드는 서울의 겨울, 거기에 그리움이 있다.
이별은 나에게 고통이지만, 내가 떠날 때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루 일을 마치고 굳은 허리를 펴며 주섬주섬 연장을 거두어 일몰의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처럼 그렇게 떠나고싶다. 아무도 모르게.
하늘은 차가운 핑크가 더해지고 어둠이 안개처럼 내려앉는데, 저녁산책은 끝나고 마음은 먼 여행에서 돌아와 따뜻한 외등이 켜진 대문 앞에서 날개를 접는다.
조희진/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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