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는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의 흐름”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역사가 진보하는 것이라면 현대사회는 과거보다 과연 정의로울까.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민주주의가 발전하여 정당성(legitimacy) 있는 자가 권력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졌으니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 전광용의 단편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 20세기 초 한국의 시대상황에 따라 처음에는 친일파, 다음에는 친소파, 그리고 마지막에는 친미파로 변신하여 민족을 져버리고 부를 축적한 인물.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살인마나 강간범은 아니지만 결코 의로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살인마와 강간범을 아무리 완벽하게 뿌리뽑은 사회라 하더라도 이런 인간이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그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비극은 이런 사례가 소설만으로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실패한 정의구현은 세기가 바뀐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를 옭아매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정치판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과거사 청산을 당장 하느냐 나중에 하느냐 다투며 소모전을 하고 있다. 친일파 청산의 시기가 어찌되었건 민족을 배신하고 친일을 했음에도 해방 후 배부르게 살 수 있었던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한 사회 분열이 아닌가 한다. 배를 채우려 의를 버리고 우리를 배신했음에도 아무 탈이 없는 집단에서 배신은 당연한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동료를 믿을 수 없다. 이런 집단에서 통합이란 먼 이야기일 듯 하다.
한국 사회를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고자 한다면, 나아가서 사회통합이 보다 잘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뼈아픈 과거를 거울삼아 재발의 가능성을 뿌리뽑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의 진보가 아닌가 한다.
최근 한국에서 이중국적 관련법이 바뀌면서 며칠사이 한국 국적 포기자가 급증했다고 한다. 한국 국적 포기자의 99.95%가 20세 이하, 그리고 98.7%가 남성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최근 급증한 국적 포기자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정의의 잣대로 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들은 물론 살인자나 강간범과 같은 범법자는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번 기회에 부당한 병역 면제를 근절해야한다. 나아가서 지금까지 부당하게 병역을 면제받은 수없이 많은 그들에게까지 새 법을 소급 적용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부당함은 세기가 바뀐 후에도 한국 사회를 옭아매는 장애물로 남아있을 것이고 정치판은 수 십 년이 지난 후에도 과거사 청산을 운운하며 소모전을 하고 있을 것이다.
국가를 버리고 군대를 면제받은 이들도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하라고 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20세기 초의 친일파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일을 그냥 넘어 간다면 “역사는 진보한다”는 카의 말은 한국에서만큼은 틀린 것이 된다.
6월이다. 3년 전 6월. 우리는 우리가 힘을 합치면 얼마나 무서운 저력을 낼 수 있는지 우리 눈으로 확인했다. 태극전사와 히딩크 감독은 4강이라는 믿기지 않은 성적으로 화답했다. 한국인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다 할지 아니면 재외동포로서 군대를 가지 않을지는 본인의 자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어떠한 방법이든 정의로와야 하고 그래야 사회 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의구현을 통한 사회통합이 가능할 때 대한민국은 또 다른 4강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무/ 세계 은행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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