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날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3개월이 지난 10월 초순경의 서울은 방화와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9월 28일 유엔군과 국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진격하여 들어왔으며 인민군은 후퇴하고 서울을 탈환하였다.
그 때 학생들은 애국심을 발휘하여 너도나도 학도병으로 지원하였다. 배재 중학 3학년인 나는 학도병으로 지원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하는데 군의관이 나를 쳐다보고 웃으며 “가서 젖을 좀 더 먹고 오지”하며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더니 지나가던 어느 장교가 내 사정을 듣더니 합격시켜 주었다. 간단한 기초훈련을 받고 포병에 배치되어 학생복 그대로 태극기를 휘날리며 씩씩하게 군가를 부르며 북으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중공군의 남침으로 인해 우리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를 넘기고 2월 중순경의 어느 날 강원도 횡성의 산간은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 힘겨운 전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잠복하고 있던 중공군들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와’ 소리를 지르고 수류탄을 던지며 습격해 들어왔다. 부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우리는 포로가 되어 낮에는 계곡에서 쉬고 밤에만 행군하여 북으로 끌려가서 동해안 원산 근처인 신고산이라고 하는 계곡에 수용되었다.
나는 기도했다. 그리고 이후부터 언젠가는 꼭 돌아가리라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초겨울인 듯한 어느 날 드디어 탈출할 때가 온 듯 싶었다. 전투원이 너무 부족하여 우리들을 부대에 배치하고 구식 총과 수류탄을 주며 싸우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들을 ‘해방전사’라고 부르며 서로 감시하고 있었다. 미군이 공격해 올라올 때 탈출하기로 결심하였다. 전투가 끝나고 모든 군인들이 잠에 골아 떨어졌을 때 나는 두 손을 번쩍 들고 흰 수건을 흔들며 ‘Help me, Help me’ 하고 외쳤다.
인간은 가장 약했을 때 가장 강해질 수 있다.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에 모두 잠에 골아 떨어지고 보초병이 지나간 후 나는 산꼭대기에 우뚝 서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남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뛰고 또 뛰었다.
이 때 보초병이 나를 발견하고 ‘도망병이다’ 하며 따발총을 갈기는데 머리 위로 옆으로 빗발치듯 날아오는 것이었다. 또 뛰었다. 너무 지쳐서 바위틈에 주저앉았다. 이 때 ‘일어나라, 달려라’ 하는 소리가 마음 속에 들려왔다.
드디어 철조망이 나타나고 미군들이 아침을 준비하는 듯 하였다. 사람은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데...
평생을 교편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어떤 어려움과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또 불행이 와도 뒤돌아보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앞만 보고 달려가라고 가르쳤다. 꿈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곳에 성공이 있다. 어떤 위기에 놓여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것이 그 때 얻은 나의 교훈이다.
이춘길 6.25 참전 학도병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