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정물화만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 왜 인물화는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사람을 그리는 것은 말이 많아서 싫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풍경화나 정물화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면 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잘 그려주어도 어디가 삐뚤게 나왔다, 실물보다 못하다는 등, 말이 많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대상보다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것이 인간이다. 조석간에 변하고, 환경 따라 변하는 예측불허의 존재가 인간이고 보면, 사람을 다루는 일만큼 힘든 직업도 없다고 생각한다.
목사를 직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다룬다는 면에서 쉽지 아니한 직업이다. 자신도 연약한 존재이면서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자신도 사랑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부어준다는 것이 말처럼 용이하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의 허물을 권면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필자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면서 목사님들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많았다. 추운 겨울 난로조차 없는 예배당에 새벽에 홀로 나와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며, 고달플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때는 양식이 떨어져서 아침에 물 한 바가지 드시고 주무시던 사모님의 모습도 보았다.
장로들 앞에서 큰 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말들을 들으면서도 신음소리 조차 내지 못하시던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 하고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이면 목사가 되어 평생을 저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나? 나는 절대로 목사가 되지 않으리라!” 이것이 어린 시절 나의 확고한 결단이었다.
해서, 고등학교 시절 수양회를 가면 집회의 마지막 시간은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다. 대개 마지막 시간에 결단을 촉구하지 않는가? 혹시 은혜를 받은 나머지 엉겁결에 목사 되겠다고 헌신할까 두려워서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와 유사한 생각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서로 이런 말을 주고받았었다. “네가 목사가 되라. 그러면 내가 돈 많은 장로가 되어 너 소신껏 목회할 수 있도록 도우마” 그러면 그 친구는 “네가 목사가 되라. 그러면 내가 도우마” 이렇게 서로 떠밀며 자랐는데 지금은 둘 다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고 있다.
물론, 철없던 시절의 생각이었지만, 목사가 된지 23년이 지난 지금도 목회가 두렵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부족한 역량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주님 사랑에 대한 빚진 자 의식과 시들지 않는 면류관에 대한 약속이 없다면, 과연 누가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박 성 근 목사
(로스앤젤스한인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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