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준비할수록 자유는 커져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한국에서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민태원의 ‘청춘예찬’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때는 웬만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다가올 미래가 가슴 벅찬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먹고 살 궁리랄지, 좀 현실적인 얘기를 할라치면 왠지 좀스럽게 보였고, 도무지 번지수가 맞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느 산림거사(山林居士)가 ‘논어’에서 퍼왔음직한 말이 훨씬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팔을 베고 누웠으니/대장부 살림살이/이만하면 넉넉하리.”그러나 세상을 산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현대시단에 큰 획을 그은 시인으로 김수영이 있다. 필자는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시 구절 하나를 들라면, 주저하지 않고 그의 시 ‘거대한 뿌리’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얘기한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그의 생은 한국의 현대사만큼이나 굴곡 졌다.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1943년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한다. 그 이듬해 만주로 이주하여 교원으로 지내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그는 연희대 영문과에 편입했다 중퇴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북한군에 징집됐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미군 통역생활을 비롯해 평화신문사 기자, 선린상고 교사 등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자택에서 양계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1956년부터는 시 쓰는 일과 번역에만 전념하다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승에서 삶을 마감한다.
필자는 어릴 적 그의 개인사를 읽고,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 겪은 사회적 홀대에 개탄하기만 했다. 그가 보듬었을 삶의 고단함을 떠올리진 못했다. 아직 어렸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황지우의 시 제목처럼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그리고 몇 구비를 지나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로 끝이 난다.
어느덧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할 일이 먼저 떠오르는 나이가 되었다. 가끔씩 내가 누릴 수 있는 재무적 자유(financial freedom)를 가늠하곤 한다. 그 자유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일찍부터 준비한 사람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겠지. 그게 공평한 것이다.
필자는 우리 자식들이 시리도록 푸른 시절에 애 늙은이로 커 가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다만 그들이, 재무적 자유 또한 건강이나 꿈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가꾸어 가야하는 것들 중의 하나임을 알고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213)892-9999
박준태
<퍼스트스탠다드은행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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