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되기 전 해인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10월 어느 날 나는 방과후 마을 친구 세 사람과 함께 토끼 사육반이 되어 일을 끝내고 나서 교실에 들렀다 위문품 중에서 밤 두 알을 슬쩍했다. 밤 껍질을 아무데나 버려 둔 것이 화근이 되어 다음날 아침 조회가 끝나고 나서 우리 네 사람은 운동장에 남아 훈육선생으로부터 누구의 소행인지를 대라고 종용 받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더니 화가 치민 선생은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그 자리에 꿇어 않아 있으라고 했다. 점심마저 굶고 지쳐있는데 여동생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가 우리를 와보시고 굳은 얼굴로 교무실로 들어가셨다. 분노에 가득 찬 아버지의 문소리가 들리고 선생은 허둥대며 우리를 풀어줬다. 그때 일본인 교장은 아버지에게 진솔하게 사과했다고 한다.
그 무렵 아버지는 상회를 경영하고 있었지만 면 소방단장이고 학교행사에는 꼭 참석하여 연설하는 유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허모라는 부자는 일인 순사부장과 호형호제하며 아버지를 징용 보내려고 온갖 간계를 꾸몄고 여의치 않자 농사를 짓던 큰 삼촌을 대신 징용가게 했다. 해방이 된 날 밤 그 허모는 야반도주하고 아버지는 치안 공백기간 치안대를 조직하여 일인 선생들과 그 가족들의 신변을 보호해줬다.
내가 이처럼 아버지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 것은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한국인들이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국적없는 경계인 신세였다는 것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친일인물 명단에는 한 시대의 선각자와 지식인과 스승들이 부일 협력자로 발표되어 있었다. 면면이 문화, 예술, 교육, 종교 등 각분야에서 전국과 국가발전에 공허한 한국 보수들의 원조들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 중에서 일제와의 동침을 강요받고 훼절한 이들의 고뇌와 주어진 시대를 적극적으로 살았던 필연성은 양해되지 않고 실질적인 일제 주구였던 고등계 형사들은 일정 조건에 미흡하다는 이유로 명단에서 제외된 것은 납득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이미 역사의 한 장이된 일제하의 친일 인사 규명은 그들의 후손들에게만 불명예스러운 족쇄를 채워주는 부질없는 짓이다. 친미, 친독재 인물을 가려낸다면 언젠가는 친북, 친김정일 인물도 가려내는 역사적 당위성을 결코 피할 수 없기 때문 이다.
역사가 정권의 이념적 시각에서 조명되고 정략적으로 이용된다면 역사는 왜곡되고 후손들에게 편견을 심어준다. 이미 6.25 남침을 통일 전쟁으로 강변하는 무리들이 한국의 보수를 역사의 변태로 매도하고 민족의 반동으로 내몰고 있지 않은가.
국회에서 친일청산을 주도한 신기남 김희선 두 의원이 부친의 일제시대의 경력시비로 패덕의 덫에 걸린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친일청산은 매국노와 독립운동 탄압자로 매듭 되어야 한다.
남진식/ 사이프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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