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며칠 전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샤핑 인파로 백화점이며 거리며 발 디딜 틈이 없다. 가족 친지들을 떠올리며 선물 고르는 재미도 잠시, 사람들의 얼굴에 차츰 짜증이 돋아난다.
전쟁을 하듯 샤핑을 끝내고 선물 꾸러미를 양손에 잔뜩 든채 전차에 올라탔을 때 베벌리 바틀렛이라는 여성의 상태도 바로 그랬다. 전차 또한 만원이어서 옴짝달싹 못하고 서있으려니 짜증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차안에 숨통이 좀 트이면서 한 소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대여섯 살 된 소년이 “저기 자리에 앉으세요”하며 한 여성의 소매를 잡아끌고 있었다. 소년은 요리조리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며 빈자리가 생길 때마다 피곤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 앉혔다. 꼬마 ‘사랑의 사절’이었다. 마침내 베벌리도 소년의 웃음 가득한 눈과 손에 이끌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나니 차안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던 승객들이 하나 둘 수줍게 미소를 교환하더니, 이야기를 주고받고, 신문 읽던 사람은 옆 사람에게 신문을 나눠주고, 선물 꾸러미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자 이를 주워주려고 세 사람이 달려들었다.
그 사이 소년은 언제 내렸는지 보이지 않는데 짜증으로 가득하던 차안에는 따뜻한 정감이 흐르고 차에서 내릴 때가 되자 저도 모르게 입에서 “메리 크리스마스!”가 튀어나오더라고 했다.
가슴 따뜻한 실제 이야기들을 모은 책, ‘영혼을 위한 치킨 수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기적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물위를 걷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만 기적일까. 만약 납덩어리가 한순간에 녹아 내리는 것이 기적이라면 납같이 굳어있던 마음이 녹아 내리는 것도 역시 기적일 것이다.
전차 안에서 납처럼 무거웠던 심신이 생기를 얻고, 꼭꼭 닫혀있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열린 현상 - 바로 사랑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절망감으로 캄캄한 영혼에 빛이 새어드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도 역시 사랑이다. 한 전화번호 안내원의 이야기이다.
“몇년 전 크리스마스 때였어요. 전화벨이 울려서 ‘전화번호 안내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하니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저 우리 고양이가 먹을 게 없어서…’”
필경 도움을 청할 데가 411 밖에 없었을 그 남자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는 목소리만으로도 알수 있었다. 하지만 안내원은 전화번호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규정 상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남성은 다시 전화를 걸어 “고양이가 너무 배가 고파요.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애원을 했다. 안내원은 규칙을 무시하고 재빨리 그의 주소를 받아 적었다.
퇴근 후 안내원은 큼지막한 고양이 사료 한 봉지를 사서 빨간 리본을 단 후 주소지를 찾아갔다. 허름한 집 문 앞에 봉지를 놓고 벨을 누른 후 그는 차안에 숨어 지켜보았다. 주름 투성이 할아버지가 나왔다. 고양이 사료를 본 순간 노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퍼져나가고, 그 미소는 “내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고 전화 안내원은 회고했다.
올해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살아갈수록, 나이 들수록 좋은 일 보다는 힘든 일들이 더 많이 닥친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상처에 새 살이 돋는 기적은 관심과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살아갈수록 깨닫는다.
크리스마스는 2천년 전 세상이라는 전차에 내려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무관심과 질시, 미움과 절망으로 암울했던 세상의 승객들에게 사랑을 가르치신 것이 그의 일생이다. 원수에게까지 마음을 여는 사랑,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측은지심, 그리고 귀가 있지만 듣지 않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지고의 사랑을 우리는 그를 통해 배웠다.
올 연말에는 ‘크리스마스’냐 ‘할러데이’냐의 논란이 유난히 시끄럽다. 성탄절의 근본 정신은 배우지 않고 곁가지만 가지고 싸우는 어리석음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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