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숲에서
김 희봉(수필가)
’성문 앞 우물곁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꿈을 꾸었네....’사랑을 잃은 한 청년의 외로운 방황을 노래한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시인 뮐러의 침울한 시에 붙인 곡임에도 들을 때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슈베르트의 수줍고 인간적인 모습이 연상되어서 일까? 그의 감미로운 가곡을 들으며 우리는 비엔나의 숲으로 향한다.
비엔나의 숲은 음악의 산실이었다. 어느 날, 슈베르트가 친구와 산책을 하다가 이 곳 작은 술집에서 쉐익스피어의 시를 보았다. 그는 첫 사랑 테레즈와의 이별을 떠올리며 메뉴판 뒤에 악상을 단숨에 써내려 갔던 것이다. 이 곡이 연인을 향해 부르는 소야곡(小夜曲), 세레나데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비엔나의 숲은 누구보다도 베토벤의 안식처였다. 그 영혼의 도피처였다. 이곳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그가 얼마나 귓병으로 고뇌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이전까지 막연히 그가 장애를 딛고 악성(樂聖)이 되었다는 교과서적 상식에 머물러 있었다. 허나 이 숲에 들어와 그의 산책로를 걸으며, 그가 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읽으며 그의 고통이 내 마음속에 조금씩 파고듦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내가 심술궂고 사람을 기피한다고 하지만 그 이유를 너희들이 알겠니? 나도 원래는 쾌활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단다. 그러나 6년여에 걸친 이 귓병이 이젠 불치의 병으로 악화돼 절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남들은 아름다운 풀룻 소리를 듣는데 나는 아무소리도 들을 수 없단다. 음악가에게 이 같은 굴욕이 어디 있으랴... 가을 잎이 떨어져 시들듯이 내 희망도 이젠 꺾이고 말았다...
두 아우 카를과 요한에게 쓴 이 유서는 신에게의 절규로 마친다. 오오 신이여. 마지막 단 하루라도 환희의 날을 주옵소서. 언제 또 다시 자연과 인간의 전당에 서서 그 환희를 맛볼 수 있을까요? 아아... 너무 냉혹합니다.
로맹 롤랑은 그의 베토벤 전기 서문에서 만약 신이 인류에게 저지른 범죄가 있다면 그것은 베토벤에게서 귀를 앗아간 일이다라고 썼다. 그가 음악가로 막 피어나던 25살부터 병을 얻어 5년 뒤인 1800년경부터는 거의 들리지 않았으니 그가 비탄에 빠져 죽음을 생각했던 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베토벤의 위대함은 역시 불굴의 창작혼에 있었다. 그는 절망치 않고 신들린 듯이 강렬하고 웅대한 작품을 쏟아냈다. 소위 중기(中期)시대란 새로운 창작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5번 운명교향곡, 6번 전원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및 소나타 제 17번 등 대 걸작들이 귀먹은 이 때, 이 숲에서 완성한 것이었다.
인솔자 M님은 덧붙인다. 만년이 되어서도 베토벤에겐 불행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그의 이상주의적이고 고결한 작품들이 낭만적이며 선율적인 음악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지요. 극심한 고통을 스스로 치유하려는 자연스런 변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른바 후기 작품시대로 들어가며 그는 피아노 소나타들과 장엄미사 등, 해탈의 경지에 이른 곡들을 쏟아냈지요. 그는 아픔을 통해 인간 내면을 누구보다 극명하게 표출해낸 인간미 넘치는 위대한 음악가로 우뚝 선 것입니다.
우리는 잘 정돈된 하일리겐슈타트 동네로 들어가 베토벤이 걷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2시경까지 작곡하다 점심 후 숲으로의 산책을 나섰다고 한다. 내친김에 비엔나 숲의 산정인 칼렌산 까지 버스로 올랐다. 숲은 검은 소나무들과 함께 너도밤나무, 전나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멀리 다뉴브강까지 닿아있었다.
우리는 숲 가까이 4백년 된 호이리게 포도주점에 들렸다. 옛 전통대로 햇포도주가 나왔다고 문밖에 소나무 화환이 걸려있다. 넓고 아늑한 실내는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들의 흥겨운 음악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산책을 마친 베토벤 선생은 어디쯤 앉았을까? 햇포도주를 음미하며 막 마음에 새겼던 새소리를 전원교향곡에 담고 있었을까? 비엔나의 숲에서 선생에게 햇포도주를 권해드리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