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0년간 남가주 발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집안은 어디일까. 많은 사가들은 망설이지 않고 챈들러 가를 꼽는다. LA 타임스의 발행인이자 챈들러 가의 시조인 해리 챈들러는 신문을 무기로 230마일 떨어진 오웬스 밸리의 물을 끌어와 LA의 인구 팽창을 가능케 했으며 원래 경사가 완만해 항구로 적절치 않던 LA 앞바다를 파 서부 최대항으로 만들었다.
노조를 미국 발전의 최대 장애로 본 그는 평생을 노조와 싸우는데 바쳤고 그 결과 LA는 지금도 미국에서 노조의 영향력이 가장 약한 도시의 하나로 남아 있다. 절대적인 공화당 지지자였던 그의 영향력 아래 70년대까지 가주에서 민주당 주지사는 단 3명이 나왔을 뿐이다. 그 중 2명이 제리 브라운과 그의 아버지다.
챈들러 가 힘의 원천인 LA 타임스를 처음 만든 것은 그의 장인 해리슨 그레이 오티스였다. 남북전쟁 때 북군 중령이었던 그는 전쟁이 끝나자 샌타 바바라에서 신문을 발행하는 등 서부 각지를 떠돌다 1881년 LA와 망해가던 신문을 인수, 다음 해 LA 타임스를 차렸다.
당시 LA는 인구 5,000의 깡촌이었다. 그러나 그는 LA의 가능성을 보고 이를 서부 최대 도시로 키우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가 비전을 가진 지도자였다면 해리 챈들러는 빈틈없는 실무 책임자였다. 처음 신문 배달 담당 직원이던 그는 오티스의 눈에 들어 그의 딸과 결혼하며 LA 타임스의 실질적인 경영을 맡게 된다. 그는 신문뿐 아니라 황무지였던 밸리 땅을 헐값에 사들인 후 오웬스 밸리 물을 끌어와 거대한 주택 단지로 개발, 부동산으로도 떼돈을 벌었다.
LA 타임스는 해리의 손자 오티스 대에 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편집 방향을 보수에서 리버럴로 선회했다. 1960~80년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타임스는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며 한 때는 중 판매 부수 120만 부, 주말 150만 부로 대도시 신문 중 최다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들어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결국 2000년 시카고 트리뷴에 팔리고 만다. 그 때도 챈들러 일가는 전체 지분의 20%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챈들러 일가가 언론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날이 왔다. 시카고 트리뷴 그룹이 시카고의 부동산 재벌 샘 젤에게 팔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170명에 달하는 챈들러 후손들은 16억 달러의 현찰을 챙기게 됐지만 언론을 통한 사회적 기여나 영향력 행사는 불가능하게 됐다.
챈들러 후손들이 신문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은 더 이상 신문 사업에 장래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LA 타임스는 지난 수년간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독자가 준 신문의 하나다. 지금 판매 부수는 전성기 때의 절반이 조금 넘는 정도고 계속된 감원에도 수지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 ‘3대 가는 부자 없다’는 속담이 있지만 미국에서도 부자가 3대를 넘기기는 쉽지 않다. 4대까지 갔던 챈들러 일가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때 남가주를 주름잡던 챈들러 가의 퇴장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