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 한인 사회의 전통 있는 사회 의료 봉사 기관인 서재필 재단에서 총무로 사반세기 동안 일해 왔던 이지영(58)씨는 ‘철의 여인’(Iron Woman)이라 불린다. 항상 짧은 커트 머리에 오똑한 코뼈가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를 보여주는데다가, 창립 이후 존폐 위기까지 처했던 서재필 재단을 떠나지 않고 흑자 재단으로 키운 강인함과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 건강함으로 철의 여인이란 애칭을 얻었다.
이지영 총무는 지난 4일 만향루 음식점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아이언 우먼이라는 별명은 홍준식 전 회장이 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3년 초대 서재필 재단 CEO로 영입됐던 홍준식(뉴욕 거주)박사는 항상 부지런한 이 총무가 한국 출장을 다녀 온 이튿날에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근무하는 것을 지켜보고 ‘아이언 우먼’으로 불렀다. 이 총무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강인한 인생 역정을 개척해 왔다.
이지영 총무는 1살 때 한국동란의 와중에서 아버지가 납북되는 바람에 홀어머니 이국희(타계)씨와 평생을 살았다.
이국희 씨는 재혼하지 않고 YWCA에서 운영하던 군산 고아원의 원장을 맡아 전쟁고아를 돌보면서 외동딸을 키웠다. 이 총무는 경기여고와 서울대 사회사업과를 졸업한 뒤 1971년 하와이대로 유학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총무는 서울로 돌아가 성심여대 전임 강사로 학계에 몸담고 있을 때 평소 친분이 있던 필라델피아 연합 교회의 고인호 목사가 중매를 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필라에서 건축사로 근무 중이던 이상준 씨와 1975년 결혼했다. 서울에서 보장된 교수직을 박차고 남편 따라 필라에 온 이 총무는 전공을 살려 필라 다운타운에 있는 이민자 지원 단체 내셔낼리티 서비스 센터에서 일했다. 당시 월남 난민 등이 많아 이민자 지원 전문 손길이 크게 모자라던 때로 이 총무는 이들을 지원하는 슈퍼바
이저로 일했다.
1975년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창설한 서재필 재단은 의료 사업을 주로 하다가 이 총무의 소식을 듣고 사회사업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합류해 주기를 요청했다. 이 총무는 “한인 이민자들이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이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총무는 당시 큰 아들 댄(현 하아네만 의대 의사)과 막내 제임스(펜 대학 와튼 스쿨 졸업 후 뉴욕 거주)가 너무 어렸지만 친정어머니를 한국에서 초청해 아들 양육을 맡긴 뒤 1980년 10월부터 노스 필라 로간에 있던 서재필 병원에 출근을 시작했다. 이 총무는 첫 업무로 한인들의 월넛 파크 플라자 등 노인아파트 입주를 적극 주선했다.
그러나 호사다마가 찾아왔다. 1985년 당시 필라 한인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재필 재단이 분열되면서 서재필 병원 차제가 존립 위기를 맞았다. 이때 이 총무는 의료원 총무까지 맡아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의사들을 새로 초빙하고 서재필 생가를 경매로 매입해 서재필 박물관으로 개조했다. 또 노스 필라 브로드 스트리트에 폐허로 방치돼 있던 우체국 건물을 경매를 통해 구입해 현재의 서재필 센터로 변신시켰다.
서재필 센터는 업무가 확장되자 정부 그랜트 사업을 유치하자는 의도에서 2002년 전문 경영인(CEO) 회장 제도를 도입하고 첫 번째 CEO로 병원 경영 전문 의사 출신인 홍준식 박사를 초빙했다. 홍 박사는 이지영 총무에게 집중됐던 업무를 분야 별로 전문화시키는 작업과 함께 차터 스쿨 개설 등의 혁신적인 운영을 했다. 그러나 고령에다가 거주지가 뉴욕인 관계로 오래 근무하지 못했다. 이지영 총무는 “홍 회장께서 업무를 전문화시켜 내가 홀가분하게 은퇴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회고하면서 “앞으로 직원들이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는 주인의식으로 근무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지영 총무가 서재필 재단 업무에 전적으로 매달리던 1991년 남편 이상준 씨는 한국 건축회사와 콘소시엄을 형성해 인천 국제공항 건설 디자인에 당선됐다. 남편은 인천 공항 건설 현장에 상주하게 돼 이 총무는 남편과 별거 아닌 별거를 하게 됐다. 이상준 씨는 공사가 끝난 뒤 연세대에서 건축과 교수로 초빙됐다. 이지영 총무는 “결혼 생활 16년 만에 남편이 한국에 가게 됐지만 자녀 교육과 서재필 재단 업무 등으로 나는 필라에 남았다”면서 “내년에 16년 만에 남편과 재결합하게 되면 모처럼 시어머니(87세)를 맏며느리로 모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설명)필라 한인 이민 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려온 이지영 총무가 올해 말 은퇴를 앞두고 지
난 25년을 회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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