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에 한국에서 잘 알고 지내던 분이 오셨기에 남편이 운전을 하고 구경 다녔는데 한 곳에 차를 세우자 이분이 급히 내리면서 대뜸 큰 소리로 “파인, 파인!” 하고 외쳤다. 저 쪽에 있는 미국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건너다본다. 그도 그럴 것이 소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없는 곳을 보며 “소나무, 소나무”를 외쳐댔으니 무슨 연고인가 싶었을게다. 남편이 얼른 “한국식 발음이다”라고 설명하자 미국사람은 머리를 끄덕이며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숲을 건너다보며 “화인!” 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손님은 자기가 한 일을 모르는 듯 했다. 보아하니 영어를 곧잘 하는 분이었는데도…
언젠가는 신문사에 칼럼을 보내며 ‘후리웨이’라고 썼는데 인쇄되어 나온 것을 보니 ‘프리웨이’로 정정돼 있어서 웬일인가 했더니 한국에 ‘외래어표기법’이 생겼다고 했다. 꽃은 어느새 ‘훌라워’가 아니고 ‘풀라워’로 변했다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외국사람이 풀라워라고 하면 꽃으로 알아듣겠는가? “자네는 미국에서 무슨 공부를 하겠는가”하고 물었을 때 “나는 파인아츠를 하겠습니다” “? ? ?” 아무리 똑똑하고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많이 했다 해도 무슨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도 알아듣게 제대로 못 한다면 낭패가 아닌가? ‘ㅎ’를 ‘ㅍ’로 바꿔놓은 사실 때문에 말이다. ‘패션’이라는 단어는 또 어떤가. 소리 나는 대로 ‘횃션 쇼’라고 쓰면 부드럽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데 하필이면 광기마저 연상케하는 ‘패션 쇼’라니 외래어 표기법이 낳은 코미디의 극치라고 보는 것은 내가 너무 늙었기 때문일까?
나는 오래전부터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국내에서 필요에 따라 생각있는 어른들이 심사숙고하여 만들어낸 ‘법’일 터이니 외국에 나와 돌아다니며 귀에 익은 약간의 상식으로는 나설 입장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좋은 책이 나왔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한글은 어떤 영어도 표기 가능’의 저자인 김덕길 박사는 생화학 전공자로 동부에서 34년간 한국어 권과는 멀게 살았는데 은퇴 후 LA에 와서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 발음과는 너무나 다른 표기법을 접한 김박사는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연구하여 책을 내게 되었다 한다. 나는 아직 그 책을 못 보았으나 과학자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이니 전문성을 가진 훌륭한 저서일 것이 분명하다.
김박사는 책을 들고 한국에 가보았지만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이 기사는 적고 있다. 당시 국내는 정권 말기라 코앞에 닥친 문제들도 버거운 판에 법으로 정해진 일을 새삼 들추어낼 엄두를 낼 형편이 아니었지 싶다. 책 내용이 좋다고 느꼈다 하더라도.
새 정부에 기대를 걸고 우선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는 자세가 필요할 줄로 안다. 진취성 있고 똑똑한 우리의 젊은 세대가 세계로 나아가 여러 분야에서 지도자가 되고 있는데 외래어 표기법의 희생물이 되어 바보 취급을 받는 딱한 현실을 똑바로 잡아주길 바랄 뿐이다. 만일 한국출신 심판이 반칙이 심한 선수들에게 “자, 이제부터는 페어플레이를 합시다”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자. 외국인 선수들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다음 경기는 짝짓기 놀이를 하려는가보다”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ㅎ를 ㅍ로 그냥 두는 한.
김 순 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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