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모(왼쪽 5번째) 회장 때 당시 김명배(왼쪽 4번째) LA 총영사의 SD 방문 환영 기념촬영 모습. 앞줄 오른쪽 끝이 이묘순씨.
SD 한인 이민사<8> 한인사회 ‘일꾼’이묘순씨
이묘순 SD 무궁화협회장은 한인회와 각종 단체에서 ‘일꾼’으로 일했다. 1991년 18대 한인회(회장 민병진) 이사로 한인회와 인연을 맺어 2년간의 공백을 제외하고 27대까지 봉사를 해왔다. 이 밖에도 현 무궁화협회장을 포함, 시민권자협회 수석 부회장, 평통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1969년 SD 정착
이 무궁화협회장은 1969년 엘카혼에서 남편과 보금자리를 꾸몄다. 아파트에서 1년 지낸 후 주택을 구입했다. 당시 4베드룸 2층 주택을 10만달러 이하에 구입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4년 후쯤 14만달러에 팔았고 지금은 100만달러 이상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인회와 인연
1990년 17대 한인회 김기홍 회장 시절 송년의 밤에서 민병진 차기 한인회장으로부터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해 달라’라는 청을 기꺼이 수락, 한인회 봉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당시 한인회장의 임기는 1년이었다. 임기가 2년으로 늘어난 것은 23대 김일진 회장 때부터.
▲18대 한인회 회고
이 회장은 이 시기를 “참 좋았다. 재미있었다”고 표현한다. 당시 정성오 수석부회장과 총무역할을 했던 주광현 한인경찰 등과 한인회보 제작에 일조했다. 스티커도 붙이고 무거운 우편물도 마다하지 않았다.
1년간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무보수로 한인회관을 돌봤다. 당시 한인회비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함께 일한 한인회장들
1991년 18대 민병진 회장 때 이사로 일했다. 당시 한인회보를 체계적으로 제작해 발송했다. 또 한인들의 법적 지위향상을 위해 자문 변호사를 선임했다. 1992년 19대 손이생 회장 때도 이사로 참여했다. 제1회 한인축제, 한국 해군사관학교 SD방문 환영행사, 추석 가요제 등 의미 있는 행사를 치렀다.
20~21대(93~94년) 문병길 회장 때 2년간은 한인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1995년 22대 정창화 회장 때 한인회 봉사를 다시 재개했다. 엘카혼 우정축제, 입양아 여름캠프 후원 등의 행사를 했다.
1996~97년 23대 김일진 회장 때는 2년 임기로 사무국장으로 재정관리를 맡았다. 한인회 건축기금 마련 조용남 초청 공연 등 다양한 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1998~99년 24대 조광세 회장 때는 부회장으로 봉사했다. 제1회 한인회장배 테니스 대회, 수재민 돕기 일일식당 등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
2000~01년 김진모 회장 때도 부회장으로 안창호 선생 동상 기금모금, 뉴욕 테러 희생자 돕기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2002~03년 26대 임영상 회장 때 역시 부회장으로 LA 총영사 간담회, 아시안 축제 등에 참여했다.
2004~05년 27대 김남길 회장 때는 수석부회장으로 회장과 이사장의 갈등으로 힘들었던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갈라졌던 한인회 수습에 봉사의 마음을 보태 봉합을 하는데 일조 했다.
<문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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