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 초 서울에서 미 대사관 관계자와 조찬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는 새벽부터 한국 외교부의 항의전화를 받느라 잠을 설쳤다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날이 바로 워싱턴에서 백악관 아태담당 보좌관인 데니스 윌더가 부시 대통령의 8월 방한을 발표한 날이었다. 한국정부와 사전 상의 없이 기자 간담회 도중 발표하는 외교적 ‘결례’를 범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서울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 노무현 정부의 대미외교에 불만이 많았던 보수층마저도 이명박 정부가 어떻게 했으면 미국이 한국을 이처럼 우습게 보느냐며 불쾌해 했다. 보수정권에 은근히 기대를 가졌던 미국정부 마저도 좀 머쓱해 하고 있는 것이 한미관계의 현주소이다.
한일관계 역시 독도문제로 다시 어려워지고 있다. 국제사회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역사교과서나 위안부 문제와 달리 독도문제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독도는 현재 한국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독도문제를 이슈화해서 국제사회로 가져가려는 것 일본의 전략이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이를 무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긴 하지만 국민정서상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중국과의 관계 역시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무역국으로서 외교적 중요성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번 중국 방문 시 이대통령은 한미동맹은 과거의 낡은 유산물이라는 조롱 섞인 말을 들어야 했다. 또한 지진 현장 방문도 중국이 별로 내켜하기 않는 가운데 이루어져 ‘국내용’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런가 하면 대북관계는 아예 단절된 상태이다. 비핵화하면 북한주민의 생활수준을 대폭 향상시켜주겠다는 비현실적인 구호만 외친 채 북한 측은 받지도 않겠다는 옥수수를 한국정부가 받으라고 사정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 관광을 하다 북한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해도 뚜렷한 대책하나 세우지 못하고, 북미 간의 핵협상이 진전을 이루어도 뒷전에서 구경만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거 어떤 정부도 지금의 이명박 정부처럼 주요국과의 외교관계가 이렇게 사면초가에 몰린 적은 없다. 더구나 국내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 더해져 이명박 정부의 앞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대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명박 대통령이 왜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너무 쉽게 선거를 이긴 것이 부메랑이 되었다. 지난 대선의 초점이 BBK에 맞추어져 이대통령의 정책을 검증하고 토론하는 기회가 매우 적었다. 또한 쉽게 이기다 보니 청와대의 주인이 되어서도 주요 정책들을 깊이 고민하고 치밀한 전략을 세우기보다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촛불시위를 촉발한 쇠고기 협상만 해도 국민정서를 너무 헤아리지 못한 결과이고, 일본에 가서 과거는 잊고 미래지향적으로 가겠다고 한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일간지를 통해 제의한 대북 연락사무소 개설이나, 한국 관광객이 총격에 사망한 사실을 알고도 제의한 대북대화도 북한과의 사전 교감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져 곧바로 거부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지난 수년간 한나라당과 이대통령은 반노무현 정서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런데 이대통령은 청와대에 입성한 후에도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면서 반노무현만 고집했다. 빨리 반노무현의 트랩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무리 전임 대통령이 못마땅하다 해도 주요 정책은 수정보완을 해 가면서 적절히 계승하는 것이 옳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인 한국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문제가 있다 해도 이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다.
이대통령은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동안 수업료를 매우 비싸게 치루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이 많다. 한미관계만 해도 레임덕에 처한 부시대통령보다는 차기 행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미래 동맹의 전략을 짜야 한다.
초반의 어려움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가 절실한 때이다.
신기욱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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