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방학은 무던히도 길다. 가스비가 비싸서 진작 세웠던 여행계획도 취소하고 아이의 과외활동 스케줄도 별로 없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아이와 서로 실랑이하며 온종일 함께 보내고 나면 이 따분한 방학이 언제 끝날까 싶다.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창밖에 펼쳐진 누렇게 삭아버린 들풀과 물기라고는 하나 없는 캘리포니아의 땅을 보고 있자니, 녹음이 우거지고 매미가 쉼 없이 울던 어린 시절의 여름이 문득 그리워진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여름방학은 한껏 목청 돋운 매미소리와 녹음으로 둘러 쌓인 대청마루 위에 엎드려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내는 내 모습이다. 내게 여름방학이란 바다로 산으로 떠나는 여행이나 미루었던 일을 해치우려 세운 특별한 계획 같은 거창함과는 거리가 먼 단지 평범한 일상의 연장이었다. 아침을 먹고 아버지께서 출근하시고 나면 집안일을 하시는 어머니 곁에서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대청마루에 엎드려 ‘탐구생활’을 펼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은행나무집’이라 불렸다. 빨간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100살에 가까운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다. 할아버지 대부터 살던 집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약간 개조한, 디귿자로 주욱 마루가 둘러지고 그 끝으로 장독대와 곳간이 나란히 있고 옆으로는 아래체가 자리한 전형적인 한옥 집이었다. 본체와 아래 체 사이의 마당 한가운데는 아버지가 아끼시던 조그만 정원이 있고 그 모퉁이에는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작은 텃밭이 있었다. 내게는 흙을 만지며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놀이터였다.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거무스레한 흙과 대비되는 초록의 무성한 잎사귀들… 그들이 서로 어우러져 내던 풋풋한 내음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점심이 되면 부추전 방앗잎전을 부쳐 먹고 동생과 나는 어머니 옆에 나란히 누워 노닥거리다가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어느새 출출해져 눈을 부비고 일어나면 빨래를 개시던 어머니가 삶은 고구마와 물김치를 가져다주신다. 동생은 식빵에 쨈을 잔뜩 발라먹고 나와 어머니는 고구마를 먹고…. 오후의 일을 잠시 돕고 나면 어느 새 쌀쌀해진 대청마루에서 바알간 봉숭아 빛 여름 노을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는다.
그렇게 조용하고 평화롭게 하루가 간다. 그다지 덥게 느껴지지 않았던 그 여름방학의 평범한 하루하루, 그 단조롭게 느껴지던 시간들이 이제는 타국생활 속에서 아련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그 때의 소리와 내음들이 다시금 새록새록 되살아나 마음이 편안하고 흐뭇하다.
딸아이를 보며 저 아이는 커서 자신의 방학을 어떤 색깔과 어떤 냄새로 기억할까 궁금해진다.
“너는 여름방학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니?”
“음, 늦잠자고, 수영장에서 실컷 놀고 수박 먹고 친구들과 컴퓨터하고...”
엄마 잔소리 들어가며 숙제를 해야 하고 점심을 햄버거로 때우고 시간이 남으면 컴퓨터 앞에 앉아 깔깔거리며 채팅에 열중하는 그런 방학? 이런 시간들이 아이가 나중에 크면 어떤 빛깔의 기억으로 남을까? 빛바랜 누런 땅처럼 무미건조한 어린 시절로 남지는 않을까?
하기는 자연환경이 다르고 성장배경이 같지 않다고 해서 내 아이가 어린 시절 내가 가졌던 그런 정감 있는 기억들을 갖지 못할 거라 단정하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속단이다.
다사로운 마음과 충분한 관심을 갖는다면 노랗게 퇴색한 캘리포니아의 풍경이 물기 머금은 촉촉한 초록보다 더 정겨운 색깔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언제나 정서적으로 채색되는 법이니까. 문득, 지루하게 느껴지던 여름 방학이 아이와 나의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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