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이대에서는 5월에 있을 창립 6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를 예정으로 미리부터 전교생에게 마스게임 연습을 시키고 학과별로 여러 가지 준비에 들어갔는데 미술과에서는 전시회를 열 예정이니 작품 준비들을 하라고 하여 나는 우선 캔버스를 어떻게 할까 하는 일부터 걱정해야 했다.
다행히 김옥길 사감님이 창고를 뒤져 선교사들이 남기고간 짐에서 사진틀을 찾아내어 “이런 거라도 쓸모가 있을까?” 하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얼마나 반갑던지 6호 P사이즈와 12호 F의 2개를 먼지를 털고 잘 닦으니 훌륭한 베니어판 화폭이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오후 실기시간에 우르르 서강으로 몰려갔다. 6호짜리를 들고 간 나는 안개가 아스라이 비낀 밤섬을 내려다보며 열심히 그리기 시작하였다.
5.16 이후 국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김현옥 서울시장이 여의도에 윤중제를 쌓을 때 밤섬이 없어진 것으로 듣고 있는데, 나의 그림도 6.25때 없어졌으나 안개 속에 떠오르는 연보랏빛 밤섬 풍경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공부하는 나로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작품을 한답시고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는 처지여서 밤에 사무실을 혼자 지키고 앉아 있는 시간을 이용하여 12호에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다. 여학교 다닐 때 어른들이 싫어서 혼자 문을 꼭꼭 닫고 들어앉아 오밤중까지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렸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그리다 쓰러져 그냥 자버리기도 하였으니 자화상 그리기에는 익숙해진 터였다.
드디어 5월이 왔다. 그 날은 얼마나 많은 손님이 신촌 일대를 뒤덮었던지 정말 대단한 성황이었다. 미술과 쪽에도 발을 돌리는 사람이 꽤 있었던 것은 해방 후 처음으로 열리는 학생 전람회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내 그림이 붙어 있는 방을 지키고 있었다. 송기의 정물화가 단연 돋보이던 기억이 난다.
입구 쪽에 김활란 총장님이 노인 두 분을 모시고 들어서신다. 쳐다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쩔쩔 매며 머리부터 조아렸다. 대한뉴스에서 본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 두 분이 아닌가? 총장님은 나의 초상화를 가리키시며 “저 그림을 그린 학생입니다. 우리 학교에서 모범적이고 아주 우수한 학생입니다” 나는 기가 막혔다. 평소에는 아무 내색도 없으셨는데 느닷없이 귀빈들 앞에서 붕 띄우시니 몸 둘 바를 몰랐으며 부끄럽기만 하였다.
이 박사님이 내 손을 잡으시고 “훌륭한 미술가가 되라”고 말씀하시자 김구 선생님도 투박한 손을 내밀어 내 손등을 감싸 쥐시며 “좋은 학생을 만나서 기쁘다”고 하셨다. 내 그림 바로 옆의 정물을 그린 송기는 나보다 더 좋은 학생이었으며 중진 작가의 기량을 가진 실력자였으니 이 일을 어쩌랴 나는 괴로웠다.
그때 입구 쪽에 5~6명의 연대 학생들이 떠들며 들어섰다. “도라쨩 그림을 봤다고 했지, 저기 붙어 있어. 보이지?” 저들은 그림만 쳐다보고 뒤쪽에 어떤 분들이 서 계신지 모르고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전람회가 끝나고 얼마 후의 일이었다. 누가 면회실에 와 있다 하여 가보았더니 처음 보는 청년이었다. 서울 법대 학생인데 학생 전람회가 열린다 하여 이대까지 와 보았는데 자화상을 잘 보았다면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책갈피에 접은 종이가 끼여 있는 것을 보니 편지인 듯하였다. 나는 속으로 자화상을 보았으면 알았을 텐데 아무렇게나 생긴 얼굴 보려고 이 신촌 구석까지 찾아오다니 할 일도 없나보다 하면서 “저는 기숙사에서 일을 하는 고학생이거든요. 책을 볼 짬도 내지 못해요. 미안하지만 받을 수 없어요” 약간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그렇게 돌려보냈다.
교실 몇 개에 학생 그림을 걸어놓고 몰려들어 쳐다보고 좋아했던 소박한 시대에 한국 최초의 학생 전람회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이대에서…
김 순 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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