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주류 오페라계의 수많은 오디션들이 열리면서 젊은 성악가들의 숨 가쁜 1년 스케줄이 시작된다. 그 많은 오디션들 중에 메이저 오페라 무대 주역의 등용문인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도 있다.
십수년 전 패기만만하던 30대 초반 이 맘 때의 일이다. 시카고 오페라단의 영 아티스트 오디션이 있었다. 나는 이미 두 번에 걸친 오디션에서 심사위원들로부터 우승 언질을 받았었고, 3차 본선은 내게 그저 요식 행위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시카고 오디션 두 주 전 나는 글리머글래스(Glimmerglass) 오페라단 공연 도중 발이 부러져, 시즌 마지막 무대까지 목발을 짚은 채로 무대에 서야 했었다. 이리하여 9월의 3차 오디션에서 1, 2차 때와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목발을 하고 노래를 하여 결과는 기대와 달리 탈락이었다.
그러나 이에 흥분된 나는 오페라단의 예술감독인 미스터 펄만에게 항의를 하였다. 당신들의 귀가 잘못되어서 전에 내게 했던 약속들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 오디션의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끝까지 내 말을 점잖게 들어준 펄만 감독은 목발 짚고 불렀던 나의 노래가 전과 달리 힘이 없게 들렸다고 말했다.
지난 북경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내팽겨 친 후 실격을 당한 선수의 소식을 접하자, 그 시절 나의 만용이 생각나 실소가 나왔다. 그나마 메달마저도 뺏겨버린 선수의 심정도 이해되었다. 자기 삶의 모든 것을 걸고서 얼마나 힘을 썼겠는가! 나의 경험을 보아도, 메달 획득에 상관없이 올림픽에까지 참가하기에는, 인정받는 재능과 혹독한 연습에 여러 차례의 선발전을 치렀으리라 짐작되었다.
필사적인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들, 패배한 선수들, 그리고 메달을 걸고 단상에 오른 선수들의 웃음과 눈물에 마음이 울컥하던 나의 시야는 어느새 촉촉해졌다.
중국의 방해응원으로 인해 여자양궁 개인전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놓친 유력 우승후보였던 한국 선수. 자신이 상황의 피해자라고 온 국민이 공감할 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자기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성숙한 태도가 마치 나의 시카고 사건에서의 어리석음을 보상해 준 느낌이 들어, 그 선수는 나의 영웅이 되어 버렸다. 극한 압박의 상황에서도 ‘결과를 책임지는’ 그녀의 겸허한 태도는 마음을 잘 다스린 진정한 승자의 모습이었다.
감동을 주는 뛰어난 음악 연주자라도, 경쟁의 승부는 ‘그 날의 상황’ 속에서 냉정하게 결정되고 만다. 나의 시카고 오디션 사건도 십여년이 지난 지금, 현실과 함께 흘러가는 삶 속에서 음악에 대한 나의 자세는 한층 더 ‘숙성’해가고 있다. 예술은, 기량 경쟁과 달리, 한가지의 정답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이란 가슴 설레는 열정을 즐기면서, 내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마저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이다.
라디오서울 ‘김양희의 이브닝 클래식’ 진행자
sopyh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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