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한 남자가 가로등 아래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지나가던 이웃이 물었다.
“무엇을 그리 찾고 있소?” 허리를 숙이고 가로등 불빛 아래를 이리저리 뒤적이던 남자가 말했다.” 우리집 현관 열쇠를 찾고 있소” 열쇠를 찾는것을 도와주던 한 사람이 물었다. 열쇠를 마지막으로 본 곳이 어디요? 열쇠를 잃어버린 남자가 대답하였다.
“저기 우리집 현관 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 가로등이 있는 데까지 나와서 찾는 거요”
“여기가 밝잖아요”
<데니얼 코틀립>의 <샘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귀절
최진실이 죽었다.
아니 그녀가 그녀의 귀중한 삶의 끈을 놓아 버렸다.
무엇이 그녀에게 인생의 의미를 하찮은 휴지 조각처럼 만들어 버리게 만들었단 말인가? 무엇이 그녀에게 삶의 전부였을 아이들을 뒤에 남기고 휘청 거리며 뒤돌아 서게 만들었는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찌 고통과 슬픔이 없겠는가?
바닥까지 치는 아픔을 어찌 한두번쯤 겪어보지 않고 살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젊음에서 방황하던 나는 누구에겐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준 기억이 있다.
그 상처는 내게 부메랑처럼 돌아와 많은 시간이 지나간 지금도 가슴이 아릴 정도로 깊은 상흔이 파여있다. 집요하게도 오랫동안 나를 옭아맨채 놓아주고 있지 않다. 또한 고향을 뒤로 하고 이곳에 왔을땐 각자 나름대로 이루고자 했던 이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과 삶의 서로 어긋난 불협화음에 당황했던 나의 모습.
내가 이루고자 했던 꿈은 저 산 넘어 가버리고 매일 매일 새벽에 일어나 어김없이 일터로 가는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나의 모습에 어찌 회의가 없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은 각각 다른 형태의 모습이 아니다 싶었다. 그 둘은 그림자처럼 늘 같이 다니는 것. 단지 어떤 식으로 대면하는가에 딸린것이라 생각하였다. 자기 집 현관에서 찾을 열쇠를 다른 곳에서 열심히 찾아대는 어리석은 모습의 나를 어느날 만나게 된 것이다.
열심히 살자 싶었다. 작은 계곡과 산 줄기가 모여 깊고 높은 산을 이루듯이 어느날 갑자기 내일이 내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싶었다.
짧은 기쁨의 순간들이 모여 큰 역경을 이겨내는 마음의 힘을 준다고 믿고 싶었다..
사소한 즐거움이 주는 의미를 그냥 넘기지 않기로 했다.
주말 아침이면 책방 커피샾에 들려 베이글에 커피 마시는 즐거움도 작으나마 의미를 부여했다.
시간날 때마다 영화를 보는 재미도 다른 힘든 것을 상쇠하곤 한다.
또한 없는 시간 쪼개내서라도 여행을 자주 가자 했다. 떠날 수만 있다면 떠나자 하는 신념으로 가방을 싼다. 남편과 가는 여행은 여행대로, 친구와 가는 여행은 또 그대로 아름답다. 혼자 떠나는여행은 외롭지만 그 속엔 풍요함이 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그 무엇을 참을 수가 없어 “ 나이 40에 남편 월급 몽땅 들고 나가 유화 재료를 샀다는 화가< 윤석남>. 그녀처럼 나를 잡아 흔드는 그 무엇에 이끌려 이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였다. 밤 11시가 넘도록 컴퓨터 들여다 보면 눈과 몸은 피곤하다. 그러나 내 의식은 기지개를 편다.
잃어버린 열쇠를 찾아 내 집에 들어가 달콤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서라도……
Lizkim525@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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