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 3월20일 위스콘신 리폰에 있는 한 작은 학교에서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예제도에 맞서 싸우기 위해 모인 그들은 무료 교육과 농민들에 자작 농장을 무료로 주는 정책 등 사회 정의와 미국 현대화를 정강으로 삼았다. 스스로를 공화당이라고 명명한 이 진보 세력은 개혁의 바람을 타고 불과 창당 6년만에 첫 대통령을 백악관에 보냈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 링컨이었다.
그로부터 154년 후 위스컨신에서 열린 공화당 집회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그를 죽여라!” “테러리스트!” “반역!”… 사상 첫 흑인 대통령 후보를 가리키는 소리였다. “테러리트스와 친구”라며 분노의 도가니를 부추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다.
‘링컨의 정당’이 오늘날 ‘페일린의 정당’이 되기까지는 긴 과정이었다. 사실 민주당이 인종차별의 거름으로 권력을 유지한 집권당이었고 공화당이 발전과 지식을 지향하며 도시 주민들과 흑인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었다. 그러나 1929년 주식이 곤두박질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링컨의 공화당이 오늘의 공화당과 유일하게 공통적인 점이 한 가지 있었다면 무제한 시장경제에 대한 맹목적 신념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공화당은 대공황의 엄청난 고통을 보면서도 정부가 간섭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저버리지 못하고 수수방관했다.
따라서 유권자들은 1932년 선거에서 대거 민주당에 몰렸고 압승을 거둔 민주당이 30년동안 미국 정치를 장악하는 발판이 됐다. 그 때 처음으로 도시 주민들과 북부 흑인들의 표심을 차지했고 이같은 새 패러다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같이 민주당이 기존 남부 지지기반에 흑인과 도시 주민들까지 더하자 공화당은 일명 ‘남부 전략’을 통해 변신을 도모했다. 인종차별을 자극해 남부를 공화당 텃밭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닉슨 때부터 서서히 시작된 변신은 점점 공화당 선거전략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영화 ‘미시시피 버닝’의 소재였던 민권운동 청년들이 살해된 앨라배마 필라델피아에서 ‘주권’(states’ rights)를 주창하며 선거 유세를 시작한 것도 인종차별에 암시적으로 호소하는 신호탄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공화당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정당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화당이 채택한 주권주의는 총기소유권 지지자들, 낙태권을 반대하는 복음주의자들 등 더 넓은 지지층을 포섭할 수 있는 수단이 됐지만 인종차별의 뿌리를 끊을 수 없게 했다. 공화당은 선거가 치열해질 때마다 인종 버튼을 누르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고 공화당의 본래 이념이었던 자유주의는 갈수록 퇴색했다. 결과는 선거에서는 이기지만 그 과정에서 이념을 잃고 미국을 분열시킨 부시 행정부였다.
원칙 없는 당파심과 무능함으로 두드러졌던 부시 행정부아래 공화당이 지금까지 소중하게 지켜왔던 한 가지 이념도 이제 리먼 브라더스의 주식처럼 휴지조각이 됐다. 자유 무역은 부를 창조하지만 부시 행정부 아래 소수만 부를 독차지, 지난 8년간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수입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30년대 대공황이 민주당에 새로운 정체성을 준 것처럼 이번 금융위기도 대통령 및 의회 선거에서 이변이 없는 이상 민주당에 대승을 건네줄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의 미래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우정아
외신 전문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