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통신(다니엘 리 통신원)
모든 사람들은 다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을 바라며 그 목표를 향해 열심을 다하고 있다. 정치인은 지방 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 또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크기만 다를 뿐이지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 열심을 다 한다. 또 교계도 더 큰 교회, 더 큰 사찰을 목표로 하는 목회자들과 스님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사는 브루클린 지역에는 작은 교회 섬기기를 소명으로 알고 목회생활을 하다가 이제 은퇴를 1년여 남기고 있는 목회자가 있어 지면에 소개한다. 이 교회의 성도는 겨우 20여명 정도. 그래도 이 교회 목회자는 목회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이 교회를 지금까지 섬겨왔다. 주인공은 뉴욕남산교회의 담임 최병철 목사(사진)이다.
그는 한국에서 한때 국가 재건 최고회의 경호대와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을 만큼 살아온 이력이 화려하다. 그는 고향인 충남 보령에서 장차 금배지를 달 꿈을 꾸며 정치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가 늦은 나이에 목회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그의 부인이 생사의 기로에 있을 때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린 후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학교 은사의 권고로 미 자립교회 선교 사명을 다짐하고 늦은 나이(당시 40세)인 1977년 1월 20일 남들이 마다하는 벽지 충남 공주 정안면 산골짜기에 있는 장원 감리교회를 섬기기 시작했다. 최 목사는 이때부터 6개월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 강원도 산골교회를 4년여 동안 시무하다 서울 봉천동 달동네에서 난곡 감리교회를 개척, 300여명까지 교회를 부흥시키고 떠났다고
한다.
이후 최 목사는 더 큰 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지만 일주일간 기도한 후 사양하고 1987년 9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아펜셀러목사 선교 1백주년 기념 해외선교사로 아프리카 세네갈 파송의 길을 택했다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 선교사로 간 그는 원주민 교회와 초등학교를 개척하고 현지인
5명을 장학생으로 선발, 세네갈 현지인 목회자를 양성하였고 세네갈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 성공사례를 남겨 선교사사명을 완수하였다 최 목사는 또 한국 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지만 1990년 선교학에 대한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오게 되고 미국에서도 주로 교인수가 작은 교회로 파송 받아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목회를 시작, 2004년도에 현재 시무하고 있는 뉴욕남산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이 교회는 렌트 비도 밀려있고 미국인 교회와의 사이가 원활하지 못한 상태였다.
최 목사는 이때 부임하여 많은 어려움을 감내하며 목회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교회 건물과 대지가 부동산 업자에 팔려 헐리게 되자 예배처소를 구하지 못하고 고심하던 중 태권도 도장을 하는 외국인의 배려로 그의 도장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어려움을 겪다 지난해 8월부터 미국교회 목사의 주선과 브루클린 83가(939 83rd)에 있는 루터란 처치의 배려로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최 목사는 여러 가지 환란 속에 어려울 때마다 기도의 응답을 들어 주는 하나님은 물론, 숫자가 적어도 묵묵히 순종하며 따라주는 교인들에게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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