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16일 오후 한승수 총리를 비롯한 각계인사들이 참석,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연합>
유신, 5·18 등 독재·불의 맞서 저항
노동자·농민 대변 인권탄압 중단 호소
“주여,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당신과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과 함께 영원을 향하여 걷고 싶습니다.
형제들을 위한 봉사 속에
형제들을 위한 가난 속에
그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면서
사랑으로 몸과 마음 다 바치고 싶습니다.”
-‘나의 기도’·1979 -
평생을 약한 자의 편에서, 사회의 어둠을 밝힌 빛으로 살아온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은 그가 유신정권 말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은 자작시 그대로였다.
종교인 김수환은 그야말로 약자의 편에서 하느님과의 만남과 합일(合一)을 갈구한 소박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께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싶은 심정,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며 신앙인으로서 갈구함을 기도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이 단순한 종교지도자를 넘어 온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이 된 것은 모든 사람을 ‘형제’로 삼아 그들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데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는 격동의 한국현대기 40년간 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다.
1970~1980년대 민주주의와 인권이 억압받던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대변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절정에 달했던 1987년 6월 항쟁당시의 일화다.
시위대가 경찰의 진압에 몰리자 뿔뿔이 흩어져 명동성당에 재집결했다. 당시 치안본부장과 안기부 차장은 이튿날 밤 김 추기경을 찾아와 “시위대를 모두 내보내지 않으면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 해산하겠다”고 위협했으나 김 추기경은 “공권력을 투입하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마 한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노동자,농민 등 인권유린을 당하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애정도 각별했다. 1978년 ‘동일방직 노조탄압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기도회에서 “왜 이렇게까지 사람이 사람을 짓밟고 울려야 합니까”라고 호소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북한의 인권 개선과 체제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해 6월, 86회 생일을 맞아 “빨리 사라져야 하는데 아직도 사라지지 못하고 하느님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차분하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는 “선종하시던 날은 말씀이 거의 없으셨고, 특별히 남긴 유언은 없다”며 “선종 10분 전까지 의식이 뚜렷했고 고통스럽지 않으냐는 질문에 괜찮다며 고개를 저으며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전했다.
2004년 미사 중 어린 아이를 포옹하고 있는 김추기경.
1981년 한국을 방문한 테레사 수녀와 김수환 추기경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에 참가한 김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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