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정겨우리만치 따사하다. 엘 카미노 병원 옆으로 그랜트 길가에, 집이 한 열 서너채 들어갈 만한 널찍한 공터가 겨우내 가뭄속에 비어 있더니 짧은 겨울비 끝으로 유채꽃을 닮은 노란 꽃들을 흐드러지게 피우며 가득 채우고 있다 .
맑은 하늘에 멀찍히 보이는 주택가에 새들이 평화롭게 날아 다니고 이름모를 화가는 밝은 봄빛의 정경을 화폭에 담느라 오가는 자동차 소음도 멈추게 하고있다. 그옆에 쪼그리고 앉아 봄볕 만큼이나 따사로운 사랑하는 이의 연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보낼 예쁜글들과 고운 마음들을 주워 모으고 싶은 심정이다.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들을 주고받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난 아직도 하얀 종이위에 잉크 냄새 폴폴 나는 편지를 받을때면 연서를 받은 사춘기의 소녀처럼 마음이 설레인다. 보내는 이의 마음이 담겨있고 받는이의 행복함이 묻어있는 편지가 빠르고 정확한 이메일이나 전화 메시지보다 훨씬 정겹고 그 여운이 오래 가는 것 같다.
아주 오랫만에 꺼내 보았다.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처음 몸을 싣고 김포를 떠나올때 다른 짐은 화물칸에 양보했지만 잃어버리면 다시 구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라 가슴에 꼭 껴앉고 가져왔던 사춘기시절의 연서 한뭉치를 오랫만에 꺼내 보았다. 부모님곁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했었야만 했던 중고생 시절, 바쁜 학교생활을 마무리하는 금요일 오후,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기숙사 뒷산에서 아버지가 보내주신 글월들을 읽다보면 수업받으면서 쌓였던 피로들, 교우들과의 소리없는 신경전속에서 얻은 피로들, 집떠난 객지생활의 외로움의 피로들이 한꺼번에 풀리곤 했었다.
독서하시다가 어린딸에게 도움이 될만한 좋은 싯구들, 마음을 살찌게 하는 인생의 경험담들, 시시콜콜한 가족안부들까지 자상하게 보내주셨던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을 읽고 나도 나의 커져가는 생각들, 학교생활에서 깨달은 느낌들을 주고 받으면서 세상을 향하여 수줍은 나의 마음을 하나씩 하나씩 열어가는 법을 그때부터 배우고 있었나 보다. 지금도 영혼을 맑게하고 마음을 살찌게 하는 아름다운 글귀나 오래 간직하고픈 예쁜 단어들이 눈에 띄면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메모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너의 맑은 마음을 읽으며”로 시작된 아버지의 글들은 “먼저 인간이 되어라 모든일에 인간이 우선인것을 먼저 배우기를… 네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할 줄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라가기를…정직을 생명같이 간직하고… 소리나는 요란한 수레보다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의 모습으로 자라가가기를…
기본적인 작은일에 성실하거라… 큰것을 얻기 위하여 작은것을 양보할 줄 아는 지혜와 너자신의 가치를 평생 지켜 줄 소중한 것을 꼭 지켜나갈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기를…되돌아 보면 10대의 소녀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과 정스런 성품이 편지지를 통하여 그대로 어린 내가슴에 새겨져 이런저런 유혹에 휩쓸이지 않고 크게 탈선하지 않은 착실한 여학생의 모습으로 중고시절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스물다섯해를 아버지와 딸의 인연으로 살다가 이별한지 올해로 벌써 스무번째 해가 되었지만 아직도 꺼내보면 아버지의 사랑이 진하게 묻어있는 빛바랜 편지에서 묘한 힘을 얻곤 한다. 아직도 다 자라지 못한 사춘기 아이처럼 내 삶의 중심을 되돌아 보게 되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삶을 배우고 사랑을 느끼고 인생을 깨달으며 살아가는 존재인가 보다. 아직도 내 가슴한켠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조용히 울려 오는 것 같다..” 사랑하는 내딸아 … 힘내거라…
봄볕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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