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꼬리 만큼 짧다는 초겨울 저녁무렵, 한 촌노(시골노인)가 쌀쌀한 강바람을 맞으며 강나루 기슭에 앉아 나룻배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오늘도 기다리던 사람이 마지막 나룻배에도 실려오지 않은 듯, 바지자락을 툭툭 털고 일어서, 노을진 들녘길로 해서 집으로 돌아간다. 지난날 내가 본 어떤 영화의 한 장면같기도 한데, 그렇지 않다면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 일이 수포(물거품)로 돌아간데 대한 실망에서 오는 나의 심정을 작가의 직업의식에서 상상해 낸 마음의 표출(나타냄)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란 딴 게 아니다. 5년전 아동극단 민들레의 ‘콩쥐팥쥐’ 공연을 마지막으로, 내 시력관계로 지금까지 새로운 공연을 미루어 오다가 시력이 다소 회복되어 이렇게 다시 글을 쓰게 된 마당에 민들레의 창단 15주년 기념공연을 계획하다가 그 일이 무산되고만 그 일을 두고하는 말이다.
연극공연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극본, 연기자, 연출, 무대, 이 네가지가 필수요건이란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히 아동극에 있어서는 연기자의 비중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어린이 뮤지컬의 경우에는 최소한 50명에 가까운 출연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어린이를 연습장까지 데리고 오는 부형들의 참여없이는 어린이 연극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학부형도 참여하는 백명에 가까운 연기자가 필요한 셈이다. 그 뿐인가, 학부형은 연습장에서 연출자의 지도를 눈여겨 지켜 보았다가 집에 돌아가서 연습시키는 연출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
그런데 불어닥친 경제위기의 한파가 학부형들의 참여를 가로막고 있다. 아동극이 청소년들의 표현력 향상과 정서교육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더러는 주택문제와 직장문제로 인해 이 일에 자녀를 참여시킬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가정이라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경기불황의 전망으로해서 그만 몸을 움추리고 말기 때문에, 지난날과는 달리 어린이와 학부형들의 발길이 아동극 무대로 옮겨지지 않는게 현실인 것이다.
내 주변이 날더러 이런 현실 속에서는 경기가 풀릴 때까지 기다려 보라고 하지만, 빨리도 달려가는 세월이 이 나이의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리고 더러는 그 나이까지 보람있는 일을 많이 해왔으니, 이제는 쉴 때도 됐다고들 하지만, 내 삶을 기름지게 받혀 온 글쓰기와 어린이들과 함께 연극무대를 꾸미며 살아 온 나에게서 연극행위의 박탈은 내 삶의 보람을 앗아가는 일이기에 내가 이 일에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크게 안타까워 하는 점은 내 개인의 삶에 대한 상실보다는, 지난 1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민들레의 홀씨처럼 일본으로, 한국으로, 그리고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지역을 날아다니며 아동극의 꽃을 피웠던 그 화려했던 역사가 슬픈 달맞이 꽃처럼 남몰래 시들고 마는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놓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1962년 내가 한국 최초로 창단했던 아동극단 ‘새들’이 15년동안 많은 공연기록을 세웠지만, 중학입시 준비공부란 시류(시대의 흐름)에 밀려 그만 사라지고만 그때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현실에서 부형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공연제작비를 도와 줄 독지가의 출현을 기대할 수도 없고, 또 내 젊었을 때처럼 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패기넘치는 젊은 후계자의 출현도 바랄 수 없고, 그렇다고 거칠게 쏟아져 흐르는 경기불황의 급류를 거슬러 헤염쳐 올라갈 수 있는 힘 또한 내게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차가운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꽁꽁 얼어 붙은 강물이 풀리면 다시 강나룻터에 나와, 기다리던 사람이 나룻배에 실려오기를 기다릴 그 촌노처럼, 나도 경제의 한파가 풀리어 다시 아동극 무대를 찾아 올 그 귀여운 동심(어린이)들과 학부형들을 기다려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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