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이주한 취재부장
만 2년이라는 짧지 않은 유예기간을 거치고 노아은행이 첫 발을 내딛은 지난 2008년 11월은 공교롭게도 은행계로서는 ‘최악의 한해’인 시기였다. 이렇듯 위태로운 상황과 우려 속에서 공식 출범한 노아은행은 예상 밖의 ‘선전’으로 정착에 성공하며 탄탄한 기반과 저력을 한인사회에 확인 시킨 바 있다. 이러한 노아은행의 ‘절반의 성공’의 5할 이상은 설립자이자 주주인 김정호 행장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행 설립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꿈’이었다고 말하는 김행장의 얼굴에서 마치 ‘청년’의 짓푸른 젊음이 엿보였다. 꿈꾸는 자의 특권인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김행장을 만나 그가 이룬 ‘꿈’과 이루어 갈 꿈, 그리고 그 삶에 대해 들어봤다.
- 노아은행이 문을 연지 5개월 정도 됐다. 시작 전과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 시작 전에는 모든 결정과정의 기준이 예상치였다면 지금은 직접 부딪혀 얻은 마켓 상황에 대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게 큰 차이점이다. 급격한 경기 침체로 은행들이 문을 닫는 상황이 줄을 잇다 보니 마켓 자체가 줄었다기 보다 은행수가 많이 줄어든, 그래서 오히려 아주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최대한 위기관리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운영중이다. 얼마 전에 감사를 받았는데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무튼 현재 전혀 조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바탕을 만들어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감사원들은 그런 바탕이 잘 형성됐다고 평가해줬다. 사람도 걷기 전에 기는 과정이 필요하듯 은행도 그렇다. 요즘은 기는 단계를 지나 걷는 것을 연습하는 상태다. 이런 탄탄한 바탕을 기반으로 올해 후반기 반등하는 경기 상황에 발맞춰 적극적인 경영을 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올해 1분기가 끝났다. 첫 실적을 보고했을텐데 어느 정도 됐나?
= 현재 대출금이 1200만 달러 정도된다. 1분기 마감했을 때는 900만달러 정도였다. 예금도 1200만 달러 가량이다. 이번 달에 예금액 1500만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현재까지 실적에 만족하는 편이다. 자본금이 1550만 달러였고 그 중 100만 달러가량 지출했다. 개점첫해 100만 달러 정도 적자를 기록했지만 타 은행들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이것은 평균치다. 금년말 이내에 월별로는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것으로 보고 3-4년 사이에 누적적자도 회복하리라 생각한다. 경기가 어려워 무리는 하지 말자는 생각이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경기가 회복된다고 예측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분기 더 지난 뒤에 흐름을 살피고 직원이나 예산을 늘릴지 여부에 대해 협의하려고 한다.
- 은행 설립을 결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 우연한 기회에 회사보조로 1985년 4개월간 마케팅 인텐시브 코스를 받으러 LA에 오게 됐다. 그렇게 잠시 미국에 있을 때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은행 이상대 행장을 우연히 만났는데,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때가 한미, 윌셔 은행 등 한국계 은행이 선전하고 있을 때다. 그 사람을 통해 커뮤니티 뱅크에 대해 알게 됐고 그 컨셉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 만남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사실 그 밑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고, 이렇게 하면 망한다는 것은 제대로 배우고 나왔다.(웃음) 그때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게 뭔지에 대해 배웠다. 이민생활을 하면서 상장할 수 있는 회사는 얼마 없다. 그나마 은행은 가능성이 있고, 커뮤니티 차원에서도 이득이 되는 비즈니스다. 그때 은행 설립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에는 정말 우연히 정착하게 된 것 같다. 미국생활은 어땠나?
=사실 부모님은 내가 장남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살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어떻게든 한국에서 관련 일자리를 찾으려고 부단히 애썼던 거다.(웃음) 외국은행 마케팅 부서에 입사해서 일할 때 소비자 행위 분석 부문에 굉장히 흥미로워서 가능하면 한국에서 그쪽 일을 하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기업 상황이 영업과 기획실이 마케팅 관련 부서의 역할을 했지만 약했다. 그러다 아까 말했다시피 우연히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고 그렇게 미국생활이 시작 된 거다. 리테일업체 운영도 해 봤다. 흑인과 히스패닉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였는데 2년반 동안 했고 그 경험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던 중 당시 뉴욕 기업은행이 지점 개설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요청이 와서 90년말경 조인했다. 거기서 9년 가량 일하면서 은행 관련 다양한 업무를 해 볼 기회가 많았다. 예금부터 SBA론 등등 많은 방면에서 일했다. 차장으로 3년 있으면서 10억달러 가까이 투자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투자은행의 경험과 지식도 얻었다. 은행 설립에 대한 꿈은 계속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험을 쌓는데 집중했다. 나이와 충분한 경험을 얻어야 은행 설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 오랫동안 뉴욕에서 생활했는데, 굳이 조지아, 애틀랜타를 선택했던 이유가 있나?
= 오히려 LA, 뉴욕 시장은 더 힘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 상황을 봐도 한창 시기 좋을 때 너무 많은 은행들이 생기는 바람에 지금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가고 있지 않은가? 나라은행에서 지역 본부장으로 일할 2005년 당시 애틀랜타는 떠오르는 마켓이었다. 그런 판단에 국제은행 인수합병을 추진했었는데 은행이라는 것이 사고 팔 때 프리미엄이 붙기 마련이다. 한데 그 프리미엄이 너무 과하게 책정돼 있어 여러 각도로 분석하고 고심한 결과 합병을 포기 했다. 그때 애틀랜타와 연을 맺게 됐고 새로 은행을 설립하기로 마음먹게 됐다. 계획은 했지만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당시 먼저 매트로은행과 선 트러스트 은행설립 승인 직후여서 FDIC로부터 은행승인을 거부당하고, 그 후 2007년 12월에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 조지아에서는 설립승인이 마지막이었고 타주 통틀어도 승인 난 은행이 별로 없을 거다. 주식공모에는 6개월 정도 걸렸다. 오히려 지금 조금 늦은게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설립했다면 아마 무리했을 것 같다. 은행 첫 설립시에는 당장 얼마를 버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바탕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
- 조만간 지점을 열 계획이라고 들었다. 개점시기는 언제인가?
= 코어 디파짓을 늘리기 위해 지점 개점을 3-4달 앞당기겠다고 FDIC에 신청해 놓은 상태다. 도라빌 지점 개점은 본점 개점 1년 후에 하기로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FDIC가 정신이 없긴 하지만(웃음) 무리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본다. 본점 건물 신축계획은 약간 유보한 상태다.
- 노아은행이 대출 여력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그런 면에서 다른 은행에 비해 불리하지 않느냐는 평가가 있다. 노아은행의 경쟁력에 대해 설명해달라.
= 자본 비율 8%까지 대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대출 여유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 실제 돈이 없다기 보다는 돈이 모이는 속도가 더디기 때문에 그런 평가가 나오는 것 같다. 코어 디파짓이 조금 더 늘어나야 30%정도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늘어난 예금액 대부분 다 코어 디파짓이다. 사실 경쟁체제 내에서는 직원들의 능력과 경쟁력이 은행자체의 경쟁력의 처음과 끝이다. 예금이나 대출상품 같은 것은 잠깐의 효과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은행이건 직원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직원의 이미지가 가장 큰 차이점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직원을 유치하고 또 그 직원들이 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서비스 마인드를 갖출 수 있도록 직원교육을 장려하려고 하고 있다.
- 직원을 교육할 때 어떤 부분에 가장 신경을 쓰는 편인가?
= 사실 은행도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세일즈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은행원은 세일즈맨이 가지는 능력과 소양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 점을 각 직원들에게 특히 강조하는 편이다. 서비스가 무조건 인사 잘하고 친절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력도 하나의 서비스의 중요한 요소다. 전문실력은 기본이고 서비스 마인드도 갖춰야 한다. 교육방법은 특별한 것이 있다기 보다는 토론을 통해 논의하고 그 결정 사항에 대해 먼저 본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토론에 많이 집중하는 편이며 토론을 통해 나온 결정에 대해 누구나 존중하고 따르게 한다. 그렇지만 유연함은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젊은 직원들과 중견직원들을 조화시키는 면도 신경 쓴다. 우리은행의 현 직원들 모두 다 이 지역 커뮤니티 은행에서는 탑의 실력을 갖췄다고 자부한다. 내가 하는 말 중에 모자란 40% 정도는 직원들이 채워주고 있다.
- 일터에서 하루 일과는 어떻게 진행되나?
= 굉장히 단순하지만 꽉 짜여져 있는 편이다. 아침에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신문이나 잡지를 매일 읽는다. 출근해서는 먼저 이메일 체크하고 그 다음 직원들과의 미팅을 갖는다. 직원 미팅이 끝나면 발로 부지런히 뛰어 다닌다. 11-3,4시까지 그 시간대가 트래픽이 없기 때문에 돌아다니기 좋다. 그렇게 고객들을 만나러 다니다가 사무실 복귀해서 다시 직원미팅, 론 커뮤니티 미팅도 해야 하고… 아무튼 바쁘다.(웃음)
- 그렇게 매일 바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여가시간이 없을 것 같다. 주말은 어떻게 보내나?
= 토요일은 아내가 거의 일한다. 나도 토요일에 일을 하는 편이다. 사실 내 시간이 따로 없다. 직원들 다 나가도 혼자 일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아내는 현재 티파니라는 보석업체에서 세일즈 일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서로 일을 해야 원만한 관계가 가능한 것 같다. 너무 서로에게 관심이 집중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웃음). 또 일요일은 격주로 일하니 거의 주말을 즐길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짬 나면 쉬거나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거나 한다. 조지아에 온 뒤로는 거의 놀러 간 적이 없다. 주일에는 안 빠지고 교회에 간다. 요즘 들어 내 믿음이 많이 자랐다고 아내가 좋아한다. 부인은 학교를 모두 미션스쿨을 나왔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녀 신앙의 기반이 탄탄하다. 나는 조용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신앙생활의 경우 무리하지 않게 하는 게 나에게 좋은 것 같다. 은행이 좀더 자리 잡히면 골프나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부인(유찬희)과의 관계가 남달리 돈독해 보이는데 부인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
=35년째 우리는 좋은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웃음) 나는 그게 지금도 참 편안하다. 동질성을 많이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84년에 이화여대 다니던 아내의 학교 축제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단체 미팅자리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또 당시 분위기가 자유연애가 시작되는 초기단계라 커플들이 유독 많았다.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는 커플들이 꽤 많았다. 아버지가 현재 91세인데 내가 장남이기도 하고 결혼은 빨리 한 편이다. 아내는 졸업후 모 방송국에서 일하다가 결혼하면서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둬야 했다. 당시 시대상이 여자는 결혼하면 일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 부부싸움은 없었나? 갈등은 어떻게 풀어가는 편인가?
= 아내는 주로 저녁에 활동하고 나는 아침에 활동한다. 그래서 지금은 싸울 시간이 많지 않다.(웃음) 아까 말했지만 처음처럼 지금도 우리는 친구 같은 느낌이다. 더구나 현재 이곳에 둘이 살다 보니 더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예전에도 다툰 경우는 고부간의 갈등 때문인 경우가 아니라면 별로 없었다. 우리 두사람 문제로는 별로 싸울 일이 없었다. 그래도 아내에게 혼(?)은 많이 난다. 술을 안마신지 5년 정도됐는데 술을 안마셔도 딴 일이 생기더라.(웃음) 빨리 싸움을 무마하는 스킬은 빨리 사과하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잘 풀어왔다고 생각한다.
- 자녀들과의 관계는 어떤가?
= 아이들은 다른 부모들과 많이 달라 신기하다고 말한다. 큰딸은 뉴저지의 로스쿨에 재학 중인데 원래는 고등학생 시절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뮤지컬에 츨연한다던가 하면서 엔터텐인먼트 방면에서 일하고 싶어했다. 현재 진로는 퍼포먼스를 직접하는 쪽 보다는 법률 관련해서 그 필드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기 나름의 인생의 플랜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 같다. 작은아들은 파이낸스를 전공하고 있다. 예전에 작은애가 맹장으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수술후 빌을 보더니 나한테 한달에 얼마 버냐고 묻더라. 그래서 의사보다 못번다고 말했었다. 그 후 메디컬 스쿨을 가겠다고 하더라(웃음).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파이낸스를 하겠다고 했다. 아무튼 의사나 기술자가 아닌 이상 미국에서 살면서 파이낸스를 공부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조언해줬다.
- 자녀들을 키울 때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나 교육관이 있나?
= 한국에 계신 아버지가 나에게 강조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겸손하게 살아라. 대신 비굴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 것을 아이들에게 강조한 편이다. 진로나 삶의 방향 같은 것에 대해서는 거의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둘 다 매우 독립적이다. 가끔은 그래서 너무 심하다 싶을 때도 있다(웃음).
- 좋아하는 책은?
= 사실 그런 부분이 내가 약한 부분이다.(웃음) 굳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고 평소 하지도 않는데 한다 하는 것도 낯간지럽고(웃음). 특별히 읽는 책은 없지만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여타 잡지나 신문을 보는 게 오랜 습관이다. 하루 한시간반 동안 거의 매일 두루두루 많이 읽는다. 우리세대의 경우 책이라는 것 자체와 익숙하지가 않은 것 같다. 뭔가를 읽는 일은 많이 하는데 한권의 책을 읽는 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 최근에 읽은 칼럼이나 기사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나?
= 워렌 버핏이나 로렌스 서머스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특정 주제보다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식 자체에서 많은 배울 점이 있다. 바로 ‘유연한 사고’가 그것인데 최근 로렌스 서머스가 경제학자들의 전망이 왜 자꾸 바뀌냐는 질문에 답했던 그 대답을 통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대개 나이가 많을수록 자신의 기존 생각에 대해 지나친 완고함을 가질 확률이 큰데 그들에게는 그 ‘완고함’ 보다는 유연함을 많이 찾을 수 있어 그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초짜’일수록 모름을 인정하지 않는 법이다.
- 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 일단은 은행을 안정시키고 잘 운영해 나가 이익을 내는 은행으로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만약 은행 자산규모가 4-5억 달러까지 도달한다면 그때는 후임자를 찾아볼 거다. 그런 의미에서 후배를 양성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다. 마지막으로..(약간 뜸을 들이다 쑥쓰러운 듯이 말을 꺼냈다) 개인적으로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일단은 아이들 학자금 융자 받은 것 다 갚고(웃음). 가능하다면 큰딸의 도움을 받아 법을 공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 나이 들었다고 꼭 어디 가서 골프 치면서 여유롭게 보내기 보다는 뭔가 봉사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고 단지 몸만으로 하는 봉사보다는 그런 능력들을 갖추면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정리 = 김은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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