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좀 별나신 분이였습니다. 이 선생님의 숙제는 다음 시간까지 시詩를 한 수首 씩 외워오는 것이였습니다.
사실 우리 학교 다닐 때 외울 것이 얼마나 많았어요? 영어 단어는 기본이고, 수학 공식, 화학 방정식에, 역사 연대(年代)까지... 하여간 우리 당시 공부한다는 것은 이해력이나 창의력을 키운다기 보다그져 달달 외우는 것 아니였습니까. 안그래도 외울 것이 많은데 입시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 시를 외운다는 것이 내 어린 생각에도 얼마나 비생산적였는지, 아마 요즘같이 똑똑한 아이들이라면 수업을 보이코트하거나 교장선생님께 야무진 항의라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괴롭기는 해도 다음 시간에 겪을 불이익(?)이 무서워서 숙제를 외어갔습니다. 국어 시간이 있는날은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짬을 내어서 시를 외웠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낭낭하게 시를 읽고 외우던 소리.. 그 때 그소리가 지금 이 나이에도 잔잔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렇게 몇 년을 하니까 시의 운韻과 율律이 입속에 맴돌면서 내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모두 시어詩語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학교 다닐 때그렇게 기를 쓰고 외었던 수학 미적분에 화학방정식 같은 것 지금 이나이에는 깜깜하게 잊었는데 그때 외운 시는 그래도 드문 드문 기억속에 되살아나는 겁니다.
벌써 오래 전입니다만 어느날 유고명 닥터가 저녁이나 먹자고 해서 갔더니 그날이 아버님 생신이였습니다. 그걸 몰랐으니 아무 준비 없이 빈손으로 그냥 간 것이지요. 그렇지만 어르신 고향이 경남 진주라는 것이 생각이 나서 변영로 시 논개을 외어서 올렸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도 깊고/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릿답던 그 아미(娥眉)/높게 흔들이오며../ 그 때 그렇게 멋쟁이셨던 닥터 유 아버님께서 지긋이 눈을 감고 감상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만.
우리 고등학교 동기 동창들은 나이가 만 60세가 되는 해에 제주도에서 합동 회갑연을 가졌습니다. 졸업한지 사십 몇년 만에 만나는 것입니다. 강산江山이 바뀌어도 네번이나 더 바뀐 그 세월. 세상에서 출세를 했건 안했건, 돈을 많건 적건, 학교 동창생들이란 만나면 바로 그 시절 그 아이들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예정대로 꿈 같은 이틀을 보내고, 떠나기 전날 저녁, 모두 아쉬운 마음으로 호텔 뒷 뜰에 삼삼 오오 앉아 맥주 잔을 주거니 받거니 담소하는데 저쪽 테이블에서 박목월의 시 나그네 구절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평생 완구 수출만 하던 한 동창이 거기까지 외우자 경찰로 정년 퇴직한 다른 동창이 이어 받았습니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술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너 기억력이 대단하구나 박목월 시또 있잖아 너를 보듬어 안고 구김살없는 잠자리에서 몸을 섞고.. 어쩌고 하는 거. ㅋ ㅋ ㅋ.임마 넌 미성년이라 그런거 몰라도 되. 그러고 그런건 시험에도 안나와.
교장선생님이 된 동창이 기억을 더듬어 박두진의 시 하나를 외었고, 목사님이 된 동창도 공초의 시 한줄, 건설회사 회장님도 또 이육사의 시 한 구절... 물론 첨부터 끝까지 다 외우기도 힘들었고, 그나마 어떤 것은 토씨가 있고 없고에 구절은뒤죽 박죽이였지만 그런 것이 뭐 중요합니까? 그래도 그순간은 모두가 시인인데. 그리고 다를 얘기했습니다. 그 별난 선생님 덕분에 시 몇 편은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아 왔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물질을 많이 쌓아 놓고 사는 삶만 풍요롭지 않다고. 그보다는 가슴에 품은 시 한 수가 있고, 그리고 외우는 시 한 구절이 있다면 우리 삶은 이미 귀하고 풍요로운 것입니다. 요즘 불경기가 생각보다 오래 갑니다. 그러나 詩心이 있는 마음은 그렇다고 메마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희망과 용기를 시와 함께 지니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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