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반가운 언니부부가 방문하러 왔다. 언니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손꼽아 기다리면서 어린시절 함께 자라던 기억이 떠올라 새삼스레 많은 생각이 오고갔다. 난 딸 셋, 아들 하나 사 남매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남아선호사상이 유난히 강하시던 충청도 출신 엄마는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한다는 사명감에 줄줄이 딸만 낳으시다가, 삽십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막내아들을 보시게 되었다. 엄마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늘 말씀하셨지만, 사남매 중 늦게 얻은 막내 아들과 맏 딸에게 관심과 사랑이 쬐끔 더 기울어지는 모양을 어린 나이지만 느끼곤 했다.
특히 둘째 딸로 사이에 끼어있던 나는 위로는 언니를 치받고 아래로 동생을 누르면서 내 자리를 확보하려 종종 분란을 일으켰던것 같다. 언니는 책임감이 강해서 엄마가 가르치는데로 따라하고 학교에서도 선생님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모범생이었다. 반면에 자유분방한 나는 집에서나 학교에서 정해진 규칙을 자주 무시하고 내키는데로 행동하곤 했다. 착하고 온순한 언니만 키우다가 둘째가 정반대의 성격으로 나왔으니 ‘못된 망아지(당시 엄마의 표현)’같은 둘째딸은 엄마에겐 야단을 쳐도 소용이 없는 골칫덩이였다고 한다.
철없던 어린시절에 언니는, 내 기준에서 본다면 정해진 궤도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사는 고루한 상대인데다가, 공통의 화제도 별로 없어 그다지 깊은 얘기는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대학시절 정의감에 불타서 동분서주하던 내가 어려운 일을 겪고 있을때, 언니가 보여준 신뢰와 격려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우리를 가깝게 한 계기가 되었다. 세월이 가면서 언니가 맏딸로 살아가며 가족을 위해 부모님의 부담을 함께 나누고자 애쓰는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되어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갑자기 결혼해서 가족하나 없는 미국으로 떠나는 천방지축 동생을 걱정하여, 비상금을 몰래 쥐어주던 언니, 가족들의 일이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않고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던 언니, 30년 가까이 간호사로 일하면서, 환자들을 돌보고 스마일 간호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온화하고 참을성있게 일하는 언니… 친정이란 말이 주는 한없는 포근함에 언니라는 말을 더하고싶다. 아, 나의 친정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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