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코칭 리더가 되는 22번째 요건은 “겸손의 힘(power of humility)”이다. 세상에 통용되는 리더십은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힘으로 팔로워들을 억압하고 조작하고 통제하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이다. 둘째는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어 덕(德)으로 팔로워들을 감동시켜 움직이는 겸손의 리더십(humble leadership)이다. 탁월한 코칭 리더가 되기 원하는 사람은 힘보다 덕을 후(厚)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 권위주의적 힘은 꼭 부작용을 낳는다. 그러나 온유와 겸손의 덕을 쓰는 리더는 싸우지 않고도 승리한다. 성경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라고 했다. 여기서 땅은 사람을 말한다. 즉 온유하고 겸손한 리더는 사람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의 시집 “순간의 꽃”에 적혀있는 짧은 시이다. 시라기 보다는 한 줄의 잠언 같다. 시인은 여기서 겸손의 눈을 갖게 된 후 새롭게 열린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그렇다.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면 눈이 새롭게 열린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이 보인다. 그 안에서 신비한 영감과 지혜가 흘러나온다.
기성자(紀?子). 그는 싸움닭을 만드는 유명한 조련사였다. 하루는 왕의 부름을 받고 싸움닭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왕이 물었다. “이제 준비되었는가?”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 제 기운만 믿고 허세를 부리면서 마냥 사납기만 합니다.”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 물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도 다른 닭소리를 듣거나 그림자만 보아도 곧 달려들어 싸울 듯이 흥분합니다.” 또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 물었다. “아직도 덜 되었습니다. 다른 닭을 보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데 그 눈에 교만과 아집이 가득합니다.“
또 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 물었다. ”이제는 거의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아무리 소리를 치고 덤벼도 전혀 동요함이나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과 같습니다. 그 덕이 온전하여 신비한 위엄이 있기 때문에 다른 닭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달아나고 맙니다.“ 장자의 우화 ”목계(木鷄)“에 나오는 말이다. 무슨 뜻인가. 싸움닭의 수준을 얘기하는 것이다. 싸움닭 중에서 제일 하수(下手)는 마음속에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한 자다. 중수(中手)는 싸우기만 좋아하고 허세가 가득한 자다. 최고의 고수(高手)는 상대가 무어라고 해도 동요함이 없이 겸손하며 외유내강한 자다. 자신을 겸허하게 낮출수록 신비한 힘이 나온다는 것을 기성자는 알고 있었다.
인류 역사를 통 털어볼 때 가장 겸손한 분은 예수이다. 그는 신비한 하늘의 권능과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 십자가 위에서 풀잎처럼 낮아졌고, 그곳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의 높이를 보여주었다. 그가 얼마나 겸손했는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겸손히 십자가를 지셨을 때, 인류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그를 주라 시인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렇다. 겸손의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새 역사를 일으킨다. 아브라함이 겸손을 따라 살았을 때 가나안 땅을 얻었고,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고, 바울이 소아시아와 로마를 복음화 하여 2천년 기독교 역사의 초석을 닦았다. 겸손은 성공의 비결이고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다.
어떤 호숫가에 개구리들이 모여 살았다. 어느 날 큰 학 한 마리가 호숫가에 내려와 앉았다. 그 광경을 본 개구리들이 서로 말했다. “우리도 저 학처럼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그 때에 한 개구리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어 학에게 다가가서 간청했다. “나도 너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겠니?” 학은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개구리는 “지금 여기 있는 긴 막대의 한 끝을 물고 올라가라. 나는 다른 끝을 단단히 물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학은 한 끝을 물고 개구리는 다른 한 끝을 물은 후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바로 그때였다. 아래에 있던 개구리들은 모두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저런 놀라운 생각을 누가 하였는고, 누가 하였는고”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때 공중에 있던 개구리는 의기양양하여 “내가 했지!”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에 맡긴다.
오늘날 한국의 지도자들을 보면 개구리처럼 “내가 했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야 할 교계의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남북전쟁의 깊은 상처를 싸매고 민족의 아픔을 치유한 링컨의 게티즈버그 명연설문은 전부 272 단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안에는 놀랍게도 “나(I)라는 단어가 한 자도 안 나온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깊이 새겨
들었으면 한다.
김창만 목사 <온누리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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