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가보훈처 선정 12월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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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서 활동한 백일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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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운*장인환 의사 재판 후원
UC버클리 졸업, 흥사단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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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북가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백일규 선생을 2010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80년 3월 11일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태어나 스무 살 때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동학접주로도 활동했다. 평안도와 함경도 등 각지를 여행하던 선생은 미주이민을 결심하고 1905년 6월 하와이로 출발했다. 하와이의 에와 사탕수수 농장으로 배치된 백 선생은 윤병구 (나중 리들리한인교회, 상항한인감리교회 담임 목사가 됨), 강영소 등과 국권회복 방책을 논의하기 위해 ‘에와친목회’를 조직하고 1여넌 뒤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뒤 대동보국회 중앙회장 겸『대동공보』주필로 활동했다.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여객선터미널에서 장인환ㆍ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선생은??7인전권위원회??를 구성하여 두 의사의 재판을 후원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의거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백선생은 이후 가을 네브라스카주로 이주하여 2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하여 1912년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기간 동안 박용만 선생이 설립한 사관양성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의 간부로 활동하며 장기적인 독립투쟁을 위한 군인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3년 7월에 신한민보사 주필로 활동하다 1915년 1월 주필직을 사임한 선생은 UC버클리에 학업을 계속하는 동시에 흥사단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중앙총회 대의원, 한인 학생 기숙사 역할을 한 버클리 한인학생양성소 설립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선생은 또 1919년 3월부터는 『신한민보』에 「한국경제사」를 연재하였는데, 이는 국내외 최초의 한국경제사 연구이자 ‘조국독립’을 목적으로 한 연구였다. 이 시기 선생은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 도산 안창호를 대신하여 하와이와 멕시코 지역을 순회방문하면서 독립운동 사령탑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선생은 1926년 이후 1933년까지 8년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과 신한민보사 사장 겸 주필로 다시 활동하였다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 참여하여 조선의용대의 재정지원을 위해 앞장섰다. 한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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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황사선(왼쪽부터), 백일규, 최정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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