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 ‘페인티드 베일’(Painted Veil)을 보았다. 서머셋 모옴이 1920년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을 영화화한 수작이다. 수묵화 같은 중국 계림의 풍광 속에 그려진 한 젊은 남녀의 사랑이 애절하다.
자유분방한 키티와 임상 세균학자 월터는 결혼 후에야 서로의 취향이 다름을 알게 된다. 키티는 남편의 자상한 배려를 외면하고 외교관과 바람이 난다. 월터는 복수하듯 아내를 끌고 콜레라가 들끓는 중국 오지 메이탄푸로 향한다. 둘의 관계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결코 아물지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의 상처가 서로의 참 모습을 발견하면서 조금씩 치유된다.
극빈한 중국인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월터의 인간애을 보며 키티는 비로소 남편을 사랑하게 된다. 월터도 아내의 역할을 조금씩 깨달아 가는 그녀에게서 연민을 느낀다. 월터는 밤낮으로 콜레라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감염이 되어 죽어간다. 그때 키티도 죽음을 무릅쓰고 남편을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다.
영화 속에서도 역병은 처참하였다. 병자들은 극심한 토사로 죽어갔다. 오염된 식수와 음식이 요인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중국인들의 매장 풍습 때문에 전염병이 창궐하는 장면이었다. 죽은 이의 영혼이 강물을 따라 저승 간다고 시체를 강변에 묻는 옛 관습 때문에 강은 끊임없이 오염되고 역병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한국에선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구제역 사태가 날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바이러스성 급성 가축병인 구제역이 전국으로 퍼져 가축매몰로 인한 환경오염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소, 돼지 3백여만 마리를 4,600여 곳에 매몰했다고 하니 한반도 어느 곳도 이로 인한 환경오염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2-3년 전엔 조류 인플루엔자로 난리를 쳤는데 이번엔 가축병이 돌고 있다.
축산 농가들이 주민들 거부감 때문에 가축 사체들을 대부분 자기 농장 안에 파묻는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매몰지들이 대부분 하천 옆이라는 것이다. 서둘러 묻은 탓에 침출수 유출을 막는 장치들이 부실, 심각한 토양과 수질오염이 우려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돼지 사체들이 개스가 차서 땅위로 솟기 까지 한다고 한다. 날씨가 풀리고 폭우가 내리면, 사체에서 생긴 유해균들과 침출수들이 하천과 지하수로 흘러들어 갈 사태에 온 나라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쓰레기나 가축매몰지에 썩지 않는 비닐을 바닥 전체에 깔고, 일정량을 묻은 다음, 반드시 그 위에 흙을 덮어 위생처리를 해 준다. 이는 온도를 높여 분해 과정을 가속화하고, 악취도 줄이는 과정이다. 그리고 침출수를 모으는 배수관과 가스를 뽑아내는 파이프를 일정간격으로 설치한다. 또한 매몰지 주위에 모니터링 장치를 설치, 침출수 방출을 사전에 철저히 감지하도록 법규로 정해 놓고 있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사람에겐 감염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구제역이 발생하면, 그 나라의 가축은 수출이 전면 금지돼 경제적 타격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라마다 발생하자마자 살처리 등으로 급히 확산을 막고 있다. 태우는 방법도 있지만 대량처리가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든다. 사전 예방만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떼로 매몰되는 한우들을 보며, 얼마 전 광우병을 예방하겠다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광적으로 벌이던 한국인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전염병 예방과 환경오염 방지는 집단 촛불시위가 아니라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구제역 예방을 위해 ‘월터’같이 양심적인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숨은 헌신이 더욱 절실할 때이다.
김희봉 환경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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