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 조상들은 산골짝, 즉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벽지 산간에 집단적인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왔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취락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우선 상호부조하는 마음이었다. 또 뜻하지 않은 모든 재앙을 면하고자 부락의 수호신으로 숭앙하게 된 것이 바로 향토 성황신이라 했으며 그 신을 모시는 곳을 성황당(城隍堂)이라 했다.
어릴 때 동네 서당 훈장님으로부터 여러 번 들은 바 있으며 또한 집안 어른으로부터 들었기에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평안북도는 어느 지방이고 어느 부락을 가도 유달리 고목들이 무성한 곳에는 성황당을 쉽게 볼 수 있었으며 음침한 그 곳을 지날 때면 여름날 삼복(三伏) 더위 때도 온 몸이 으스스 떨리며 소름끼치는 곳이기도 했다.
해마다 성황대제 올리는 것을 당굿이라 하였는데 내 고향 영변 당굿이 특히 유명하다고 각 지방에 널리 알려져 있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향토문화사에 기록돼 있다. 영변 고을의 성황대제 제단은 북당과 남당이 있어 각각 동네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숭앙되었고 특히 북당은 시장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장터계를 조직하여 경비를 부담하였으며 일부는 고을의 부유한 사람으로부터 기부금과 찬조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기에 남당보다 북당의 세가 월등하게 우세했다.
해마다 올리는 제물(祭物)은 당시 영변 보통학교 앞 도로상에 세 계단으로 짚을 덮어 지붕을 만들어 제단을 설치하고 오색천과 색색 조화를 만들어 장식하였고 대제는 일 년에 한 번 길일(吉日)을 택하여 사오일 봉행하며 부락민의 질병과 입신출세의 신덕을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며 정성을 다한 마을 사람들이 대제에 참가했다.
오늘날 현대인은 이해가 안 될 것이나 우리나라 역사 드라마에 가끔 이러한 장면이 소개되곤 한다. 제관은 마을 사람 중에서 부유하고 심덕을 겸비한 사람으로서 봉제에 일가견이 있는 지도자가 선택됐고 신주는 무녀 즉 무당 사오명과 장구, 징, 제금, 꽹과리, 새납 등 십여 명이 참가하며 우선 제관, 신주 및 관계자들이 제당에 나아가 간단한 제를 올리고 신위(神位)를 가마에 태워 선두에 모신 후 신주무당은 장사복(將師服)으로 가무장하고 백마를 타고 뒤를 따랐다. 그리고 제관, 무녀, 주악, 참관자 순으로 행렬을 지어 장단에 맞춰 제단에 이르러 신위를 단에 모신 후 제관에 의해 대제가 엄숙하게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성황제를 올린 후 무당, 즉 무녀들의 당굿이 시작되었는데 먼저 성황신을 모시고 강신 굿, 대감놀이, 거리굿 등 순으로 사오일간 계속하는데 특이한 것은 무녀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겹게 춤과 노래를 부를 때면 이를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합세하여 춤을 추며 한데 어울려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내 어릴 때 본 향토문화는 오늘날 더 이상은 볼 수 없는 것이라 전설의 고향을 말한들 무슨 소용 있을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 문화를 알면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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