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와 함께 오로지 한길...퀸즈 YWCA의 산 증인
1995년 뉴욕시 봉사상을 수상한 Y 리더들이 줄리아니 시장과 함께. 왼쪽부터 노혜미 부회장, 홍인숙 총무, 줄리아니 시장, 권숙영 회장, 뉴욕시 커뮤니티 담당자, 한정숙 부회장.
미국내 250개 지부 중의 하나로 탄생한 퀸즈YWCA는 지난 70년대 한국여성들이 악조건 속에서 억척스럽게 일구어낸 작품이다. 예술인들의 경지에서 본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하나의 예술작품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완성시킨 주역으로는 22년간 총무라는 직책을 고집하며 온 정성으로 Y를 가꾸어온 홍인숙이라는 싱글 인생이 자리잡고 있다.
1999년 은퇴로 접어들었으니까 그로부터 13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에게서는 Y 냄새가 짙게 풍긴다. 예나 지금이나 화장끼 없는 얼굴에 단발머리는 그의 등록상표다. 일하는 여성임을 입증해 준다. 퀸즈Y의 영원한 총무 홍인숙, 지금은 고문이라는 머리표가 붙어 ‘고문 총무’라는 흔치않은 직도 갖고 있다. 아마도 총무라는 이미지는 그의 생전 따라붙을성 싶다.
퀸즈Y나 이의 모태였던 뉴욕시티Y, 주위의 모두가 그의 은퇴를 말렸던 건 사실이었다. 그가 조직의 산실이요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이니까. 그러나 55세의 한참 일할 나이에 조기은퇴를 결심한 데는 나름 소신이 있었다. “93년에 건물이 되고 보니까 Y가 잘 돌아가는 거예요. 직원들도 좋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1세로서 할 일은 다 한거지요. 프로그램 아이디어도 다 나왔고 1,5세, 2세들을 키워주어야지 그네들을 뒷선에 있게 하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결심을 한 거죠. 나는 뒷선으로 물러나고 그네들을 앞세워야 되겠다 해서 은퇴를 한 거죠.”
그후로 할일이 없어졌다. 은퇴 직후 취직을 하겠다고 우스개 소리를 했지만 그역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Y라는 상징적 이미지가 훼손될까봐 모두들 말린 것 같았다. 다행히 젊은 시절 뉴욕시티Y에 들었던 리타이어 프로그램이 있어 거기서 나오는 연금으로 생활은 어렵지 않다. “제로에서 시작해 하루하루 근근히 살아왔던 Y인데 그 가운데서도 먹고 살 걱정을 안했어요. 바보가 되어서 그랬는지 나중에 보니까 참 용감했더라구요”
4월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리타이어먼트 프로그램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8월이 되어야만 55세가 되는데 그때까지 파트타임이라도 유지하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대답에 “아 이렇게 도와주는 방법도 있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즘은 건강에 신경을 좀 쓰는 모습이었다. 허리와 어깨를 움직이지 못할만큼 악화된 적도 있지만 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 아니냐는 질문에 Y에 남자가 없으니까 무거운 걸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
그에게 있어 Y는 용접된 이미지다. 그로부터 떼어놓기 힘든 Y와의 인연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세대 신학과를 수석졸업 했을 때 최이순 YWCA회장(백낙준 전 연대총장 부인)의 부름으로 서울YWCA 프로그램부 간사로 들어가면서 그의 Y인생이 펼쳐졌다. 당시 본부가 명동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세인들은 Y가 유한마담들의 집합소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홍인숙의 미션은 변두리에 있었다.
디센트랄라이즈라고 해서 Y에 못오는 사람들, 즉 공장 여직공, 버스 여차장, 여자 군인, 그리고 지역 주부들, 교도소, 이런 지역활동부를 맡았다. 한달에 20여군데씩이니까 거의 매일 강사를 모시고 한군데씩 가서 신앙강좌도 하고 여직공이나 버스 차장들에게는 결혼 적령기니까 결혼에 대한 것들, 그리고 주부들에게는 그당시의 사회적인 이슈들을 깨우쳐주는 역할이었다. 지금 보면 하나님이 그의 앞길을 훈련시키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척 내성적인 그에게 있어 매일 이사님들 모시는 일, 강사를 교섭해야 되는 일들은 참으로 버거웠다. 그러던 그에게 Y로부터의 탈출기회가 생겼다.
어머니와 오빠와 언니들이 살고있는 뉴욕으로의 이민이었다. 60년대 초 전문직 의사로 미국에 온 오빠의 초청으로 영주권을 취득한 어머니가 한국에 남겨진 홍인숙을 초청했던 것. 그의 미국 입국은 1971년 12월14일이었고 사실상의 입국 동기는 공부였다. 공부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무언가를 하려던 심산이었지만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쳐 일단 계획을 접고 브롱스의 링컨병원 실험실에 취직했다. 단기코스로 테크놀로지스트 라이선스까지 받고 실험실에서 세균 검사 하는 일을 3년간 했는데 거기서도 잘 풀려서 부 수퍼바이저까지 됐다.
다소 생활이 안정될 무렵 그가 서울에서 모셨던 한국Y의 박순양 총무가 회의차 뉴욕을 방문했다. “공부 끝내고 돌아올 줄 알았는데 미국생활 엔조이 하면서 이렇게 살려고 미국 왔느냐”던 꾸지람이 계속 마음 한구석에 부담이 되던 끝에 뉴저지의 드루신학교를 두드렸다. 신학 석사과정으로 MTS(매스터 오브 테오로지칼 스터디스) 코스 3년을 마치고 나서 한국행을 염두에 둔 편지를 박순양 총무에게 띠웠다. 이제 5월이면 졸업을 하는데 한국으로 가려고 한다, 무엇을 했으면 좋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그 말미에 여기와서 살다보니 한인 커뮤니티 안에 참으로 문제가 많다. 모두들 아이들 때문에 미국이민 왔다고들 하지만 미국을 너무나 모르고 아이들 문제가 많다는 내용도 곁들였다.
박순양 총무로부터 돌아온 회답은 의외였다. “한국에는 일꾼이 많다. 그리고 Y에서 훈련받은 사람은 필요로 하는 그곳에서 봉사를 해야 된다”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 뉴욕한인 YWCA의 창립이었다. 전부터 모임을 갖던 한국Y 출신 김명자, 김영자, 김은순, 서희전, 이경애, 이정숙, 우옥임, 장순옥, 홍인숙 등 9명이 1978년 5월6일 창립모임을 갖고 초대회장에 김명자, 총무에 홍인숙을 선출한 것이 오늘날 독립된 퀸즈YWCA의 출발점이었다. 이들의 화두는 한인 가정이었다. 맞벌이 부부의 어려운 가정을 지켜주기 위해 단칸방에서 어린이 방과후 학교를 시작했고 노인문제, 청소년 문제 등을 다루면서 재정부담은 이사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Y라는 세계적인 조직 속에서 발전하기 위해 초창기에는 브루클린Y의 ‘Korean Friends of the Y’로 시작하여 뉴욕시티Y의 울타리 속에서 ‘Flushing Outreach Program’으로 운영됐고 1993년에는 우여곡절끝에 회관을 마련하면서 2004년 드디어 ‘YWCA of Queens’라는 독자적인 조직으로 거듭 태어났다. 기독교 정신에 뿌리를 두고 지역사회에 공헌한다는 창립정신에 따라 뉴욕 한인사회의 각종 문제 해결에도 참여했다.
80년대 초의 마사지 팔러 문제, 국제결혼 여성들의 문제, 청소년 문제 같은 이슈에도 과감히 참여하고 의견 수렴과 실태조사 등 가정을 바로 세우자는 목적으로 한인사회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한인사회와 미국 주류사회의 다리 역할에 중점을 두어 주이시 커뮤니티와 함께 조직한 노던 퀸즈 헬스연맹을 통해 해마다 헬스 페어를 크게 열고 있다. 또 플러싱한인회 홍종학 등과 더불어 중국 커뮤니티와 함께 하는 음력설 페레이드 태동에도 기여했다.
Y의 미래에 대해서는 한인사회만 생각하는 폐쇄성을 탈피해 타민족까지 어우르는 진정한 의미의 여성 봉사단체가 되어야 하고, 현재 그길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일생을 Y 하나밖에 모르고 지내 온 여인, 홍인숙의 40년 뉴욕생활은 한인사회의 형성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이민사, 바로 그것이다.
조종무 <국사편찬위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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