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여. 이스탄불을 떠나 앙카라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 험한 돌산 서역 땅끝이 낯설지 않습니다. 아! 공항 벽에 높이 걸린 유럽 축구팀 환영 플래카드에 박지성의 환한 미소때문인지.. 게다가 곳곳에 나부끼는 삼성과 LG, 그리고 현대 자동차의 광고 깃발들이 마음을 뿌듯하게 합니다. 미국에 40년 가까이 살았어도 나는 왜 아직도 뼛속까지 한국인 인지 모릅니다.
가는 곳마다 터어키 사람들의 한국인에 대한 순진무구한 후의가 느껴집니다. 그들의 친절에는 6.25때 풍전등화같았던 극빈국 한국을 도와준 나라, 한때 우리보다 우월했다는 거만함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급성장하는 한국의 국력에 경의로움을 담아 “피를 나눈 형제나라”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합니다.
벗이여, 이런 호의를 받으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요즘 한국관광객들 중엔 터어키인들을 업신여기는 예가 흔해 이스탄불 신문에 ‘왜 터어키는 계속 한국을 짝사랑만 해야하는가’하는 르뽀기사가 날 정도라고 합니다. 약자는 업신여기고 강자에겐 비굴한 졸부같은 성격이 오스만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씁쓸해 집니다
앙카라에 내리자마자 우리는 한국전 참전 터어키군인들의 추모탑을 찾았습니다. 조촐한 외곽 동네의 공원입니다. 팔각정 콘크리트 탑 주변으로 터어키군인들의 이름과 나이가 반듯하게 적혀 있습니다. 불과 19세에서 20대초반의 군인들입니다. 꽃다운 청춘들이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동방 끝의 작은 우방을 위해 싸우다가 3천2백여명이나 전사하고 부상을 당했습니다.
벗이여, 나는 내 아버지를 공산집단에 잃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내 자식을 전쟁터에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집니다. 하물며 낯선 땅의 자유를 위해 이름모를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죽어갔을 아들의 시신을 거둔 부모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헌화하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오스만 터어키족의 후예답게 끝까지 용맹스럽게 싸우다 산화한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잠시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을 볼때마다 공치사는 커녕 오히려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라고 먼저 내미는 이들의 친근한 손을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잡아주는 일일 것입니다.
친구여, 꼭 보고싶었던 터어키의 국부, 케말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의 기념관에 왔습니다. 아타튀르크는 ‘터어키의 아버지’란 칭호라고 합니다. 이곳을 보고 터어키는 역시 큰 나라라는 실감을 합니다. 이 나라 국민들은 나라의 지도자를 세우고 기릴줄 아는 민족이란 부러움이 앞섭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터키의 육군 장교로, 숙적 그리스를 대파하고 1923년에 오스만 제국을 쿠데타로 타도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1,300년 동안 이어져오던 회교 칼리프제를 과감하게 폐지하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법으로 제정, 근대 터어키를 세웠지요.
그의 기념관엔 참배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대기를 둘러보면, 그도 독재자의 오류와 인간적인 실패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터어키 민족들은 그런 허물보다는 훌륭한 개혁 업적을 높이 기리며 그를 국부로 추앙해오고 있습니다.
이 땅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 생각을 합니다. 케말 아타튀르크와 같이 조국의 민족중흥을 일으킨 빼어난 지도자였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의 기념관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지도자를 세우는 데 인색하고, 가난했던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푼 이웃들에게 거만한 한국인들이란 비난을 면치 못할 일입니다.
뼛속까지 한국인이면 우리들의 핏속에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한은 물에 씻어버리는 의로운 선비정신이 흐르는 민족성을 잘 알고 있지않습니까?
벗이여. 높은 하늘에 터어키의 월성기와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나란히 나부낍니다. 그 뒤로 케말 아타튀르크와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이 겹쳐보이는 게 저만의 착시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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