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출신 볼티모어 티모시 윌리엄스 씨
박대통령 미 방문 소식에 감격...“사진 전해주고 싶어”
윌리엄스 씨는 부산 하야리아 캠프에서 미군 헌병으로 근무하던 1974년 8월 15일 육 여사의 피격 소식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 근무 초년시절이었지만 한국에 흠뻑 빠져들던 윌리엄스 씨는 그 사건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며, 사건 후 구미와 김천 방면에서 경비를 담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육 여사가 어느 대학에서 연설하는 것을 TV로 보고 존경하기 시작했다며, 그녀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엄격했지만 당시 한국민에게 꼭 필요했던 최고의 대통령”이라며 “그를 무척 존경하고 좋아했다”고 밝혔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피살된 1979년 10월 26일을 한국민에게 비극적인 날이라고 칭했다. 그는 이후 육 여사의 사진을 한국의 영자신문에서 오려내 간직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는 “모친의 사망 이후 가정은 물론 국가까지 돌보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회상하며, “국가를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갖지 않는 자기희생을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구와 김포공항 근무시절 박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경호가 심해 접근할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볼티모어에서 출생한 그는 9남매 중 차남으로, 부친과 형은 경찰이었다. 1967년 육군에 입대, 1967-68년과 1971-72년 두 차례 월남전에 참전했다. 1974-80년 대구와 부산의 미군기지에서 헌병으로 근무한 뒤 1년간 메릴랜드 에버린 군수시험장에서 근무하고 다시 한국으로 파견됐다.
윌리엄스 씨는 1983-1985년 주한미군 세관 특수임무 수사관으로 김포공항 세관서 근무하기도 했다.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이 기간 중 KAL기 폭발사건이 일어나 직접 바그다드로 가서 현장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아주 친절하며, 매우 좋은 기억뿐”이라고 거듭 말했다.
그의 한국 사랑은 1987년 전역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2001년 은퇴할 때까지 볼티모어시 보안국 경찰로 근무했다. 그는 이 시절 한인업소들을 자주 방문했다고 말했다.
당시 한인업소들은 강·절도 등 각종 범죄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한인상인들에게 안전 및 범죄 예방에 대해 조언했다. 그는 한인상인들이 피폐해가는 볼티모어 다운타운을 되살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고 판단했기에 이들이 견디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료들이 한인상인들을 무시하거나 욕 할 때면 나서서 막아서곤 해 동료들로부터 “국적이 어디냐”는 핀잔도 들었다.
윌리엄스 씨의 사연은 그가 단골로 찾는 볼티모어 시내 ‘제리스 리커’의 김용구·승금실 부부에 의해 알려졌다.
1984년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국을 찾지 못했다는 윌리엄스 씨는 한국의 발전상을 말로만 들었다며 살아 생전 다시 가보고 싶다고 말하고, 그동안 간직했던 육 여사의 사진을 박 대통령이 워싱턴에 왔을 때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박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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