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전자료는 발견됐으나 해방후 자료는 처음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사회 민족과독립 운동의 선도역할
이글은 본보의 요청에 따라 지난 8월 15일 리들리에서 발견된 ‘대한인국민회 중가주지방 회의록’에 대한 가치와 국민회에 대해 홍선표 박사(사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책임연구위원)가 이메일로 보내 온 내용이다. 홍선표 박사는 미주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을 연구한 사계의 전문가로 지난 2011년에는 ‘재미한인의 꿈과 도전’책자를 출판하기도 했었다. <손수락 기자>
이번에 발견된 대한인국민회 중가주지방 회의록은 그동안 해방 이전의 것은 다수 발견되고 알려진 바가 있었으나 처음으로 생각된다. 내용면에서 볼 때는 해방이전 전성기 시절의 대한인국민회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부터 20년간을 대한인국민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리들리를 중심으로 한 중가주지역의 활동상을 파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소중한 자료로 생각된다. 리들리를 중심으로 다뉴바, 팔리어, 프레스노 등지의 중가주 지역은 이민 초기부터 김형순, 김호, 한시대 등의 독립운동 인사들이 결집되어 매우 활기차게 활동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번 국민회 회의록은 해방 이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의 면모를 리들리라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게 함으로써 대한인국민회의 전체 위상과 면모을 밝혀내는데 매우 귀중한 그런 자료로 평가된다.
국민회의 본 명칭은 ‘대한인국민회’이다. 편의상 국민회라 하지만 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가 통합해 설립한 미주한인사회 최초의 통일 단체로 탄생되었다. 그 이듬해 전흥협회와 대동보국회가 합류해 1910년 5월 그 명칭을 ‘대한인국민회’로 부르고 명실상부 미주한인사회 최고의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가 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민족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미주 한인사회의 안녕과 자치, 교육과 산업육성, 그리고 조국의 독립 달성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조직은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중앙총회 의 산하에 북미 • 하와이 • 멕시코 • 시베리아 • 만주 등 5개 지역에 지방총회를 두었고 그 밑에 116개소의 지방회를 두어 해외독립운동의 중추적인 기관으로 성장했다.
1913년 5월 하와이지방총회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사단법인의 관허를 얻었고, 북미지방총회는 1914년 캘리포니아 주당국으로부터 법인 관허를 얻어 정부적 기능을 갖추었다. 이로써 대한인국민회는 총영사관의 임무까지 대행하여 한인의 생명과 재산 및 권익 증진은 물론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선도했다. 당시 미주 한인들은 누구나 국민회의 회원으로 등록해 회비가 아닌 의무금을 납부해야했다. 이러한 대한인국민회는 1922년 3월 하와이지방총회가 대한인교민단으로 바뀌고 떨어져 나가 북미지방총회가 대한인국민회총회로 축소된 이후 잠시 위축되지만 해방 전후까지 미주한인사회의 민족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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