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매 옷이 서늘하게 느껴질 무렵부터 비가 오곤 했었다. 비가 몇 차례 내릴 때마다 여름내 무성했던 나뭇잎들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저녁공기가 조금씩 축축해졌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던 그 길은 하루가 다르게 다른 냄새들로 바뀌었다. 어떤 날은 차갑고 딱딱한 나무냄새에서 어떤 날은 비를 잔뜩 머금은 눅눅한 바람 냄새로. 그렇게 몇번의 비와 바람이 지나고 나면 10월 중순, 나뭇잎들이 여름내 숨겨뒀던 저들의 색깔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1월까지 그 색은 절정을 이뤘다.
대학교 때 친구들 몇 명과 가을의 지리산을 등반해 보자고 밤기차를 타고 내려갔었다. 새벽에 기차에서 내려 어깨 가득 무거운 배낭을, 그것도 등산용이 아닌 둘둘 말아올린 담요까지 싸든 배낭을 들고 지리산엘 올랐다.
그때의 사진 속 20대 젊은 얼굴들은 지금 모두 아줌마들이 되어 지리산 초입도 겁낼 부실한 체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땐 달랐다.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오르고 올라 산장에서 밤을 보냈다. 아, 낮에는 그리 덥던 지리산이 밤에는 그렇게 추울 수 있다니!산장 위아래 층을 꽉 메운 사람들의 열기도 새벽에는 다 식어버려 담요 한장 덮고 마룻바닥에 누운 나는 밤새 덜덜 떨며 잠들지 못했다. 침랑이라는 걸 갖고 와야 이런 데서 잘 수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다음날 내려오던 길의 지리산 어디 쯤. 아마도 산을 한참 내려와 마을 가까이였던 것 같다. 10월말의 산이 그렇게 눈부시고 눈물 나게 아름다운 색깔로 우리를 맞이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저 멀리 아득한 곳에 빨갛고 노랗고 보랏빛으로 물든 나무 뭉터기들이 바람에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내리막길에서 바라보는 산속의 단풍은 사진으로는 찍지 못했지만, 기억 속 가장 선명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여행작가 선배는 ‘가장 멋있는 장면은 사진 찍을 생각을 못해 눈에 담았다’라고 했던가. 아마도 나에게 지리산의 가을단풍과 그 젊은 날의 시간은 그렇게 추억으로 남아있는 장면인 것 같다.
비가 오지 않는 남가주의 계절은 숫자로만 가을임을 말해주는 듯해서 늘 아쉬운데, 요즘 들어 마음이 고파서인지 가을이 곳곳에 눈에 띈다. 흔히 단풍나무라 부르던 빨갛게 잎이 변하는 불가사리 모양의 나무도 동네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특히 햇볕을 많이 받았던 곳일수록 그 잎의 색깔이 불그스레 달라져있는걸 보게 되어 반갑다.
단풍이 가져다주는 추억놀이는 겨울바람이 매서워질 11월 말이면 슬슬 잦아든다. 추수감사절 준비로 바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뭔가 추억에 빠져서 과거를 그리워하는 내 모습이 좀 초라해보였었다면, 이제는 차라리 그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내 유년과 청년의 시간을 보낸 모국의 가을이 마음속에 찍어 놓은 추억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꺼내보며 말이다.
그곳에서 받아낸 내 성장의 수분들과 양분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음을 기억하며, 이렇게 풍성하고 넉넉한 추억이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도 변함없이 햇볕 찬란하게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가을을 새로운 눈으로 본다.
지구 어느 편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시간이 여기는 이리도 싱싱할 수 있음을 또 감탄한다. 2014년 반짝이던 이곳의 가을이 언젠가는 분명 추억의 한 부분이 될 것이 틀림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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