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희씨 사진. 천연희씨가 남긴 자필 기록. 천연희씨가 하와이에 사진 신부로 갈 때 쓴 여권. <연합>
일제 강점기 미국 하와이로 이주한 ‘사진 신부(Picture Bride)’ 중 한 명인 천연희(1896~1997)씨의 유품이 10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가 소장하던 천연희씨의 유품과 각종 자료 모음인 ‘천연희 컬렉션’을 장서각에 기증받았다고 19일 밝혔다.경남 진주 출신인 천씨는 일제 강점하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던 중 20세이던 1915년 6월29일 하와이 마우이섬 파이아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던 길찬록씨의 사진 신부로 미국에 건너갔다.
’사진 신부’란 먼저 하와이에 이민한 신랑감의 사진만 보고 편지로 결혼을 약속하고서 결혼 이민을 떠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진 신부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신랑감이 부담한데다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하와이로 왔으므로 신부들은 도착 당시 거의 무일푼이었다.
신랑은 대부분 신부보다 10년 이상 나이가 많았고 저임금 노동에 종사했으며 도박이나 술에 빠진 이들도 있었으나 신부들은 결혼을 파기하고 귀국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사진 신부들은 도착하자마자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일부는 신명부인회나 부인교육회, 대한부인회, 대한부인구제회 등에서 사회활동에 참여하거나 상해 임시정부에 모금액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천씨 역시 결혼하면서 농장 노동자 옷 세탁 등 온갖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국민회, 부인구제회, 동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외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했고 이승만이 발행한 ‘국민보’와 ‘태평양잡지’를 구독했다.
’천연희 컬렉션’에는 1971년부터 천씨가 자필로 남긴 자전적 기록, 자신의 삶을 구술한 것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1915년 하와이 이주 당시 일본으로부터 발급받은 여권 등이 포함됐다.
한중연 관계자는 "자료가 외국에 산재된 탓에 그간 한국에서 사진 신부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다"며 "천연희 컬렉션은 신부 스스로 구축한 자료로서 초기 한인 이민사를 세밀하게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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