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엄마가 왔다. 딸은 매년 방학마다 넘어 다니던 태평양을 처음으로 넘어서.
나는 그 말을 스물두 살, 추석의 기운 사이에서 피어나던 동화사 코스모스 꽃잎들 앞에서 들었다. “너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될 거다”라고, 동화사의 젊은 스님이 말했다.
나는 넘겨짚어 버렸다. 스님이 그렇게 말한 건 내가 미국인 친구를 절에 데려와서 그럴 거야. 외국인 템플스테이 참가자한테 통역을 해줬으니까 인사치레로 하신 말일 거야, 하고. 그 마음을 읽었는지 엄마가 덧붙였다. “스님들은 보통 사람들이 못 보는 걸 본데이.”
한 해가 지나고 나는 태평양을 넘어왔다. 스물세 살 추석은 미국의 낯선 동네에서 보냈다. 스물넷과 스물다섯의 추석도 그랬다. 미국의 추석은 빈곤했다. 누군가가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추석인지도 알아채지 못한 채로, 알아챘다 해도 그러려니 하고, 세 해 동안 추석을 물 흐르듯 흘려보냈다. 스물 둘, 동화사에서 보낸 추석은 내 기억의 한 켠에서 뽀얀 먼지만 맞았다.
영어로 빼곡한 비행기 표와 서류 뭉치를 바라본다. 태평양을 넘어 다니려면 꼭 필요한 종이. 그렇지만 나는 안다. 엄마는 이걸 하나도 읽을 수가 없다는 걸.
내 머릿속엔 걱정이 가득 찬다. 필요 없어 보이는 서류들까지 정리해 한국에 있는 오빠에게 건네준다. 전부 다 프린트하고 한국어로 무슨 서류인지 메모지에다 써서 엄마가 알아볼 수 있게 붙여 주라는 말까지 함께.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여행영어 핵심회화 100문장 같은 책이라도 사서 보내야 하는지,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린다. 어라, 그런데 무언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만 같다.
잊어버린 걸 찾아 삶의 궤적을 되돌아가 본다. 열일곱, 내가 대학을 시작하고 난생 처음 듣는 영어강의와 씨름하고 있을 나이, 엄마는 딸이란 이유로 고등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외할아버지와 씨름하고 있었을 거다. 열여덟, 내가 좋은 성적을 받겠다고 낮이건 밤이건 도서관에서 살면서 밤 열시나 되어야 하늘을 바라보며 집에 가던 나이, 엄마는 낮에는 공장에 나가고 밤에는 학교에 가면서 밤 열시나 되어야 하늘을 바라보며 집에 갔을 거다.
열아홉, 내가 처음으로 태평양을 넘어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미네소타와 마주했던 나이, 엄마는 새하얀 먼지로 뒤덮인 섬유기계들을 마주했을 거다. 스물, 내가 와인색 원피스를 입고 성인이 된 자유를 맘껏 즐기던 나이, 엄마는 성인이 된 책임 때문에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시장 앞에서 와인색 원피스를 팔고 있었을 거다.
내가 씨름했던 것, 내 밤 열시, 내가 마주했던 것, 내 와인색 원피스는 엄마의 그것들과 전혀 겹치질 않는다. 그렇게 나와 엄마의 궤적은 겹쳐지질 않는다. 전혀. 단 한 순간도.
내가 마주했던 걱정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바뀌어 나를 휘감는다. 내가 꼬부랑글씨를 읽고, 버터 섞인 말로 말하고, 태평양을 집 앞 호수마냥 넘어 다닐 수 있게 해준 건 무엇이었는지. 어긋난 삶의 궤적에서 조금이라도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면 엄마도 꼬부랑글씨를 조금이라도 읽고 말할 수 있지 않았을지. 딸과 아들이 끊임없이 요구해 왔던 엄마의 노동이 조금이나마 엄마 자신을 향했다면 어땠을지. 회한도 안타까움도 미안함도 아닌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총천연색의 감정이 나를 무섭게 눌러온다.
내가 잊었던 건 스물두 살 추석의 기억. 세계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될 거라는 스님의 말.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기억을 되돌려 본다. 그제야 찾아낸다. 스님의 말 사이에서 피어나고 있던 추석의 코스모스. 엄마의 양분을 쪽쪽 빨아 이제 곧 피어날 딸의 꽃봉오리. 꽃봉오리를 알아본 젊은 스님. 그리고 딸의 꽃봉오리와 함께 피어날 엄마의 보람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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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소 /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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